흔히 후기인상주의 작가 고흐와 비견되는 무주 사람(경주 사람으로 보는 견해도 있음) 최북은 그의 호 호생관(毫生館)이 말해주듯 붓 한자루로 조선과 중국 일본을 오가며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짓눌린 조선 유교사회 탓에 그의 기행(奇行)은 작품보다 더 크게 부각된 면이 없지 않다. 어느 세도가 양반이 마음에도 없는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하자 스스로 한쪽 눈을 찔러 애꾸눈이 되었다는 일화가 그것이다. 또 금강산을 여행하다 "천하의 명인이 천하의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며 구룡연 폭포에 뛰어 들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하지만 국립전주박물관이 마련한 탄생 300주년 특별전은 그의 작품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그는 중인 출신이었으나 남종문인화풍으로 일가를 이뤘고, 시·서·화에 모두 능했다. 영의정을 지낸 당대의 문장가 남공철이 자신의 문집에 최북의 전기 '최칠칠전'을 남길 정도였다. 칠칠(七七)은 최북이 자신의 이름 북(北)을 파자해 지은 별명이다.
이번 전시에는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180여 점 중 산수화, 화조영모화 등 57점을 선보였다. 표훈사, 사시8경첩, 계류도, 메추라기, 게 등이 눈에 띤다. 이번에 전시되지는 않았으나 1763년 종이에 수묵담채로 그린 '한여름(松下觀瀑圖)'은 북한의 국보로 지정돼 있다.
한편 무주읍 출신으로 일본 규슈제대(九州帝大) 영문과를 나온 눌인(訥人) 김환태는 1930년대 우리 문단에 순수비평의 씨앗을 뿌렸다. 35년의 짧은 생애동안 김동인 김상용 정지용 등 다양한 작가와 작품에 대한 평론을 발표했다. 또한 도산 안창호와의 친분관계로 구속되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다.
서울대 권영민 교수는 "일본 군국주의의 사상 탄압에 대응하면서 발표된 그의 평문에는 문학비평의 대상이 사회도, 정치도, 사상도 아닌 문학 그 자체라는 명제가 제시돼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무주군은 이들의 이름을 걸고 문학관과 미술관을 개관했다. 이들의 예술혼을 널리 알리는 계기였으면 한다. /조상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