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넘어 고귀한 희생을 기억합니다

조금숙 광복회 전북지부장

 

一門 九 義士 (일문 구 의사)라는 말 들어 보셨습니까?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방곡 마을에 고흥 유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고흥 유씨 가문은 아홉분이 모두 독립유공자입니다.

 

이와 같이 한 가문에서 9명이라는 많은 사람이 같은 시기에 독립유공자로 배출되었다는 것은 온 집안이 망하는 것 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3대까지 못 산다는 각오를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중 3가문은 실지로 손이 끊기는 비운을 맞고 말았습니다.

 

민족의 자존을 지켜내야 한다는 유씨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나라사랑 정신과 민족혼이 뿌리내리지 않았다면 과연 一門 九 義士 의 탄생이 가능했을까요? 그렇다면 고흥 유씨는 어느 가문일까요?

 

임진왜란 후 양성 현감을 지낸 유지호라는 사람이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로 이거해 오며 시작됩니다.

 

九 義士 는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에서 출생한 유중화(자는 치복)를 중심으로 유연청,유영석,유연풍,유태석,유연봉,유명석,유준석,유현석 등 아홉분입니다.

 

이때 유중화는 도내 각처에서 봉기하는 의병들과 구국의 일선에서 조국 위해 자신의 한 몸 바칠 것을 결심합니다. 의병 동지 유지명·송태식과 전략을 세운 뒤 유씨 8인과 생질(누님 아들)이유종·이태종을 선두로 1907년 가을부터 의병조직 군자금 마련등 무장 항쟁을 본격적으로 시도합니다. 여기에 동조한 병사들이 280여명 규모였다 하니 그의 세력은 호남과 충남까지 뻗쳤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 부분입니다.

 

익산 이규홍 의병단과 연합전선을 펴기도하고 구의사를 중심으로 완주 비봉면 소농리 불당동에 병기 제작소를 두고 창검·탄환·화승총을 만들었으며, 사냥총으로 총포를 개조하여 체계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고산 익산 여산 용담 진안 진산 금산에 이르기까지 활동을 넓혀 적의 군마를 상당히 격살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받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고흥 유씨 一門九義士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데는 험란한 사연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증빙 자료 미비로 제반 서류가 반려되었고 뒤늦게 찾은 판결문에는 엉뚱하게도 살인범 으로 기록되어 있어 가문이 망연자실 하였다 합니다. 유영석의 증손인 유희태(민들레 포럼 대표) 一門九義士 유족회장의 눈물겨운 노력은 참으로 민족정기 선양의 표본이 되기도 했습니다. 만일 유희태 유족 회장의 끈질긴 정부 상대가 아니었다면 파렴치한 오명을 안은 채 나라 위한 유공들이 그대로 묻힐 뻔 했다는 것입니다. 침묵으로 일관했던 정부는 드디어 1983년에 공적을 인정해주어 독립유공자 훈장을 수여했고 활동에 비해 훈격이 너무 낮다는 사회일각의 비판이 거세지자 다시 1990년 유중화는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추서하고 남은 8 의사는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각각 훈격을 높인 것입니다.

 

유희태 유족회 회장은 매년 6월 6일이면 구 의사를 추모하는 제사를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입구에 지리한 일문 구의사 사적비 일대에서 펼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5 가정의 후손만 참석하고 남은 유족은 연락 자체가 끊기어 찾을 길이 없다 합니다.

 

九義士의 항일 활동은 1910년 경술 국치에 이르기까지 실지로 전투가 이어졌으며 국치 이후에는 행적을 숨기고 지하운동을 계속하였습니다.

 

1910년 유중화는 체포되었으나 동지를 살리려고 자신의 혀를 깨물었으니 일본 헌병은 유중화를 현장에서 총살했고 남은 8 義士 는 1917년 밀고에 의해 일시에 체포되면서 이들에게 강도범이라는 터무니 없는 죄명을 뒤집어 씌운 것입니다.

 

호국보훈의 달 6월만이라도 세월을 넘어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