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좋은 비

이연희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또렷한 기억은 없으나 노곤했던 봄날에 단잠을 잔 것처럼 잠이 잠을 취하게 했던 지난밤이었다. 잠속의 꿈, 꿈속의 잠이었으니 쌓인 피로를 한 방에 날려버린 기분이었다.

 

거뜬한 몸으로 일어나 창밖 풍경과 마주했다. 밤새 비님이 살짝 다녀가신 모양이다. 비에 젖은 나뭇잎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간밤의 이상야릇한 기운이 바로 비 때문 이었구나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마도 열 살을 갓 넘겼던 그 때부터 비를 좋아했던 게 아니었나 싶다. 파란 비닐우산이나 누런 지(종이)우산을 받고 등하교를 하던 날은 괜스레 설레고 기분 좋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비 내리기 전, 시큰둥한 하늘의 낯꽃 또한 싫지 않았다. 검회색 구름이 점점 더 드리워지면 하늘보다 더 낮은 자세로 창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렇게 앉아서 이런저런 상념으로 긴 시간을 보냈다. 시커먼 구름이 성난 짐승이나 험상궂은 형상으로 다가올 때면 겁에 질려 후다닥 커튼을 내려야 했다. 천둥 번개가 하늘을 두 동강이라도 낼 것처럼 으르렁거릴 적에는 지난 시간의 허물을 반성하고 용서를 구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키려 덤빌 때는 그를 잠깐 원망도 했다. 그럼에도 비가 내리면 낭만을 찾고 여유를 즐기려는 분위기의 여왕이 되곤 했다.

 

종종, 비를 몰고 오는 습한 바람이 좋아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나뭇가지가 춤을 추고 풀들이 돌아누웠다가 우르르 일어서는 들녘에서 나는, 나무가 되고 풀을 닮아 같이 눕고 함께 일어서서 등뼈를 곧추세웠다. 세찬 바람에 부러지지 않고 휘어지는 잔가지의 아픔이나 풀들의 멀미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직 그들만의 유연함에 우우우~ 탄성을 질렀다. 강함의 본때를 보여주는 그들의 인생철학에 박수를 보냈다.

 

후드득 - 빗줄기가 강가를 건너 올 때면 재빨리 둥구나무 아래로 달려갔다. 나무 아래 넓적한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거나 늙은 나무 몸통에 몸을 기대고 서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맥없이 그랬다. 내 발치에 빗물이 흐를 즈음이면 내 몸에도 한기가 스미어 오돌돌 떨면서 집으로 향했다. 풋내 나는 이십대, 깜냥에는 그런 게 낭만을 즐기는 것이라고 여겼다.

 

때 맞춰 울고 싶은 날에는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터이니 펑펑 울 수 있어 좋았던 비. 울음소리마저 아니 그 설움의 덩어리조차도 기꺼이 감싸 안아 주었던 고마운 비. 뿐인가, 울 수 있는 행복을 누리고 난 다음의 가벼움이라니….

 

지금도 나는, 저만큼에서부터 퀴퀴한 흙내음과 함께 산을 넘고 실개천을 가로질러 오는 비가 그냥 좋다. 그래서인지 비 내리는 밤에는 긴 시간 포근한 잠속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따금 비와 더불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도 있다. 필경 그들은, 비를 보면서 내 생각을 했음이니 또한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요즘, 온 국토가 가뭄에 메말라가고 있다. 마치 일상에 절어 사는 나의 일상처럼 건조하고 팍팍하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늘은 시원한 빗줄기 보기를 소원한다. 그들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빗소리와 함께 따스한 안부를 건네야겠다고 생각하니 불현듯 솟구치는 그리움이 언덕을 넘는다.

 

※ 수필가 이연희 씨는 1995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으로 등단, 수필집'인도 가는 길','풀꽃들과 만나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