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권유로 정치 입문… 대선 실패 후 현장에서 길찾아

정동영 민주당 상임고문은 본보 조상진 선임기자에게 태블릿PC로 '담대한 변화, 준비된 약속'을 보여주고 있다.   안봉주기자 
정동영 민주당 상임고문은 전북인과 진보진영에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5년 전 여당 후보로 대선에 나섰으나 530만 표라는 엄청난 차이로 낙선한 것이다. 몽골기병처럼 파죽지세로 치닫던 그의 정치역정도 이 때를 계기로 전환점을 맞았다.

 

하지만 그는 밑바닥에서 부터 다시 시작했다. 미국 금융위기와 용산참사가 계기였다. 땅 위에서 몸으로 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고통과 단련의 터널을 지나 다시 한번 우뚝 설지 관심이다.

 

그는 순창군 구림면에서 1953년 7월 27일, 9형제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4명이 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장남이 되었다. 전주로 옮겨 전주초등학교와 북중, 전주고를 다녔다. 도의원이던 선친은 고교시절 돌아가셨다. 서울대 국사학과에 입학했으나 유신 반대 시위로 구속돼 강제징집을 당했다. 그가 수감되자 어머니는 가족을 데리고 상경, 셋방에서 재봉틀로 생계를 이었다.

 

출소 후 정 고문은 새벽이면 아동복 바지를 보따리에 싸들고 청계천 평화시장으로 나갔다. 대학 졸업 후 전주에서 음악교사를 하던 민혜경씨를 '납치'해 결혼하게 된 일화는 유명하다.

 

1978년 MBC 보도국 정치부 기자로 발을 디딘 후 승승장구했다. 미국 LA 특파원과 뉴스데스크 앵커를 지냈다.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권유로 전주 덕진에서 출마, 15대와 16대 연속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되었다. 이어 40개월 동안 명 대변인과 최연소 최고위원에 올랐다. 그가 정치인으로 일대 도약한 것은 2000년 민주당 쇄신파동을 거치면서다. 당시 청와대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동교동 실세였던 권노갑 고문의 2선 후퇴를 요구한 것이다. 이후 경선지킴이로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큰 역할을 했고, 두번에 걸쳐 열린우리당 의장을 맡았다. 통일부 장관 겸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을 지냈으며 2007년 집권여당의 17개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본선에서 이명박 후보에 고배를 마셨다.

 

18대 총선에서는 서울 동작을에 나와 떨어졌으나 2009년 전주 덕진 재선거에 무소속으로 나와 당선되었다. 19대 총선에서 당의 권유로 서울 강남 을에 나가 다시 떨어지는 아픔을 맛봤다. 가족은 부인과 미국 스탠포드대를 나온 장남 욱진, 연세대에 재학 중인 차남 현중 등 아들 2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