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지갑

에피소드 한 토막. 영국의 대표적인 금융 경제학자인 케인즈(1883∼1946)가 미국의 워싱턴 D.C에서 친구와 함께 호텔에 묵었다. 친구가 손을 닦고 수건을 한장 쓰고 버리자 케인즈는 손을 닦은 뒤 수건을 두 세장이나 썼다. 그러면서 하는 말, "내가 이렇게 버려야 고용이 증대되고 불경기가 극복될 것이다." 불경기 때에는 가급적 모든 것이 더 소비될 수록 좋다고 믿었으니 케인즈가 이런 농담을 던질 만도 하겠다.

 

케인즈는 불경기를 극복할 대책으로 이자율 인하와 정부 재정의 적자 운영을 통한 수요 극대화, 소득의 재분배를 통한 소비성향 증대 세가지를 들었다. 앞의 두가지는 세계적 대공황을 경험한 탓이라 투자 유인 쪽에 무게를 둔 것이지만 인플레이션이라는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뒤의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소득 재분배는 적극 장려해야 할 정책적 수단이다.

 

경기가 매우 좋지 않은 모양이다. 제조업도 그렇고 자영업자들도 모두 울상이다. 작년보다 더하다는 푸념이 나온다. 가히 세일천국이랄 정도로 길거리 상점마다 세일 표시가 내걸려 있다. 심지어는 유명 브랜드 제품을 70∼80%까지 세일하는 곳도 있다. 그런데도 매상이 오르지 않는다.

 

로드샵은 물론이고 백화점 경기도 마찬가지다. 국내 모든 백화점이 사상 처음으로 한 달간 동시 세일에 들어가 있다. 극히 드문 일이다. 그런데도 소비자들이 지갑을 잘 열지 않는다. 백화점 관계자는 "불황도 이런 불황은 처음이다. 고객수도 눈에 띄게 줄었다."고 말했다.

 

엊그제 통계청이 발표한 가계수지동향에 따르면 도시근로자 중 소득 상위 10%, 이른바 부자들의 소비(월 401만원)도 전년비 1.9%나 줄었다. 98년 외환위기와 2002년 카드사태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부자들의 닫힌 지갑은 내수를 위축시켜 경제 전체의 활력을 떨어뜨린다. 심리적 위축으로 이어지는 것도 문제다. 하물며 서민은 더 말해 뭣하랴. 주유비, 생필품값, 집값 등 월급만 빼고 모든 게 다 올랐다. 서민은 여력이 없어 지갑을 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래저래 상대적 빈곤감만 커질 뿐이다.

 

정치인들은 저마다 경제전문가를 자처하고 나선다. 국민생활을 책임지겠다고 떵떵거린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런데도 우리 경제는 왜 이 모양인지 원…. /이경재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