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삶이 어디 있으랴

김동수

   
 
 

"컵에 담긴 물은 소금 한 숟갈을 넣으면 짠맛이 납니다. 그러나 그 소금을 호수에 넣는다고 물맛이 짜게 변하진 않습니다. 그냥 호수 그대로지요. 당신의 마음이 하늘처럼 넓고 바다같이 광대할 때 평화는 흔들릴 수 없습니다." 라는 구절이 마음에 들어 인터넷 카페에 올렸다. 그랬더니 누군가 바로 댓글을 달았다.

 

"돌멩이를 던진들 꿈쩍할까요? 그릇이 바다와 같을진대…, 하지만 제 마음은 컵에 담긴 물이랍니다. 오늘도 찰랑찰랑 흔들리고 있습니다."라고, 옳은 말이다.

 

흔들리지 않는 삶이 어디 있으랴. 나이가 들어도, 수행을 많이 한 성직자나 고승이라 할지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는지는 몰라도, 흔들리고 부대끼며 번뇌·망상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게 범부들의 삶이 아닐 까 한다. 그래서인지 시인 도종환도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흔들리며 피는 꽃」)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문제는 한 송이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효범 스님은 그것을 '물동이 속의 바가지'에 비유한 바 있다. 어린 시절 우리의 어머니나 누나들이 물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에 이고 올 때, 물동이 속의 물이 출렁거려 이마에 쏟아지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물동이 속에 바가지를 하나 엎어놓아 물의 흔들림을 바로 잡았던 기억이 난다. 바가지가 출렁이는 물의 구심점이 되어 흔들림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7-8년 전이었던가. 태풍이 일본 열도를 몰아칠 때, 일본에서는 새로운 건축법이 소개되어 뉴스를 장식한 일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흔들리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건축법이었다. 일본은 지진으로 해마다 인명과 재산 피해가 많아 '어떻게 하면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이것이 언제나 그들의 큰 관심사였다.

 

처음에는 철근 콘크리트 내진(耐震)벽으로 건물을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고정 하중법'을 썼다. 그래도 손실을 줄일 수가 없어 그 뒤에 나온 것이 '적재 하중법'이다. 그것은 건축물 안에 있는 사람이나, 각종 물건의 무게를 잘 받쳐주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등장한 건축법이 이른 바 흔들리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이동하중법'이란 것이다.

 

이는 건축물에 가해지는 각종 외부의 충격을, 흔들림 속에서도, 스스로 흡수하여 건축물을 끝까지 잘 견디게 하는 건축법이다.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이것이 바로 '물동이 속의 바가지 공법'인 셈이다. '정중동(靜中動)'이 아니라 나긋나긋 흔들려 무너질 것 같으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동중정(動中靜)'의 삶의 방식인 것이다.

 

불가(佛家)에서도 이와 같은 '동중정(動中靜)'의 삶의 방식이 있다. 외부의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아, 명경지수와 같이 맑은 마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평상심(平常心)이 그것이다. 평상심의 '평(平)'은 너와 나, 주(主)와 객(客)의 차별이 없는 공간적 평등이요, '상(常)'은 고금(古今)과 유무(有無)의 변환에도 흔들리지 않는 시간적 평등의 경지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의 흔들림에도 물들지 않아 고요하고 맑은 마음의 상태가 유지될 때 비로소 평상심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평등하고, 밝음과 어둠도 결국 마음 하나에서 비롯된 일시적 과정일 뿐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마음 수행법이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그 마음의 흐름과 근원을 깨달아 마음의 중심을 잡는다면, 그게 바로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 주도적 삶이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로 가는 지름길이 아닌가 한다.

 

※ 김동수 시인은 1982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하나의 창을 위하여''그리움만이 그리움이 아니다''말하는 나무'등을 냈다. 백제예술대 교수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