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보는 그리운 애국지사 행적

조금숙 광복회 전라북도지부장

   
 
 

외세와 봉건 지배층의 침탈을 보며 현실에 눈을 뜬 박준승(1865.11.24~1927.

 

3.24) 선생은 전라북도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에서 출생했다. 선생의 호는 자암이다. 어려서부터 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하면서 농업에 종사하던 선생은 20대에 이르러 현실 문제를 고뇌하기 시작했다.

 

개항 이후 물밀듯이 밀려오는 외세와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는 위정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선생은 점차 우국청년으로 성장해 갔다. 특히 일본과 청국 상인들이 공산품을 가져와 비싸게 팔고 그 대신 싼 값으로 미곡을 구입해 대량으로 반출하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피폐해진 농촌의 현실은 선생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다.

 

당시의 양반 지배층들은 도탄에 빠진 민생문제를 나 몰라라 하고 자신들만의 배를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있고 더구나 외세와 결탁해 일반 민중에 대한 강탈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러한 광경을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선생은 반침략 반봉건 운동방향을 모색 했다.

 

그 시기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근대민족운동은 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는 선각적 양반을 중심으로 중인 지식인과 양인 상공업 자본가들에 의해 추진되고 있던 위로부터의 개혁, 즉 계몽 운동 이었다. 또 하나는 일반민중이 주체가 되어 아래로 부터의 혁신 운동이었다. 전자의 운동 이념은 개화사상이었고 후자의 운동 이념은 바로 동학사상이었다. 그러나 근대화를 이루고자 한 개화사상은 외세에 밀려 취약해지고 외세의 침탈로 궁핍화 현상이 심화되어 일반 민중들에게 지지를 얻을 수가 없게 된다.

 

반대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기치로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제창된 동학사상은 본래는 종교 이념이었지만 일본의 침략이 구체화되고 봉건 지배층의 수탈로 이를 극복하려는 현실사회의 이념으로 진화해 민중의 폭넓은 인기를 받게 된다.

 

3월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서 박준승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앞에 놓고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한용운이 대표가 돼 "오늘 우리가 모인 것 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다. 우리는 민족의 대표로서 책임이 막중한 선언을 하게 되어 그 사명이 중차대하니 향후에도 공동으로 합심하여 조선독립을 절실히 기도합시다"라고 하는 요지의 식사를 하였고 마지막으로 참석자 모두는 만세 삼창을 목이 터져라 불렀다.

 

이렇게 해서 기미 3·1운동의 불을 지핀 것이다. 이때 일본 총독부가 나타나 일경 경무 총 감부로 압송 되었다. 이때 일경의 신문이 참으로 가증스러웠다. "왜 목숨 바쳐 독립운동을 하느냐?"고 물었을 때 "조선은 4천년 전에 건국하였으며 나도 날 때는 독립국 국민이었다"라고 선생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박준승 선생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을 복역, 고문당하고 출옥 후 재차 독립운동을 모색하다가 1927년 3월 24일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광복을 못 보고 한이 서린 눈을 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상을 추서했다.

 

되돌아보는 그리운 애국지사들의 행적을 되새겨보며 광복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67회 광복절 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