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석집의 추억

송준호 우석대 교수

 

가장 한국적인 도시라는 우리 전주에도 옛날에 방석집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칠십 년대에 대학을 다니면서 술깨나 마셨던 이들의 가슴 한쪽에는 방석집에 얽힌 추억 한두 개쯤은 찰랑거리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방석집도 급수가 있었습니다.

 

흔히 요정이라고들 불렀던 고급 한정식집이 윗자리였겠지요. 'OO정'이나 'OO회관'들 말입니다. 그곳에서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젊은 아가씨들이 즉석에서 따끈따끈하게 구워주는 가야금 소리가 고급술의 감칠맛을 더해주었을 겁니다.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대학생들한테 그런 술집은 아득한 나라의 얘기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술 따라주던 여자들 속치마에 땟국물 마를 날 없어도 오가는 인정 하나는 푸지고 걸쭉했던 방석집은 따로 있었습니다. 갖은 반찬과 찌개 안주로 막걸리를 퍼마시다 흥이 나면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 옆구리에 젓가락 장단을 두드리며 송창식과 어니언스를 돌려가며 불러재꼈던 그 방석집 출입문 이마에는 대개 'OO집'이라고 적힌 함석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술값 착한 OO집들은 주로 전주역(현재의 시청사 자리)하고 덕진공원 근처에 몰려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술값 대신으로 싸구려 손목시계까지 선뜻 받아주던 주인아주머니의 인심만은 큰이모의 팔뚝처럼 넉넉했습니다. 내가 아는 어떤 선배는 친구들이 술값 얻으러 나간 사이 볼모로 잡혔다가 곁에서 술에 취해 졸고 있는 색시를 방석 위에 자빠트린 적도 있다며 가끔 우쭐대기도 하는 걸 보면 그 OO집들에는 댄서 같은 순정도 넘쳐났던 것이지요.

 

그런 방석집도 이제는 시대변화에 따라 전성기의 모습을 찾기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의 그 방석만은 세월을 거슬러 이 도시의 제법 괜찮은 한정식집을 고슬고슬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거의 모든 삼겹살집까지도요. 겨울에는 솜방석, 여름에는 대자리 방석.

 

그런 걸 보면 이 도시의 음식점 사장님들은 너나할 것 없이 그 시절 방석집이 못내 그리운 모양입니다. 아니면 우리네 전통적 난방문화 만큼은 잘 보존해서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 있거나요. 사실 이건 방석집에서 술 한 번 푸지게 마셔본 적 없으면서 엉뚱하게도 그 방석 때문에 간혹 곤혹스러울 때가 있어서 늘어놓는 푸념입니다.

 

학내의 보직 때문에 나는 외국에서 우리 대학을 찾아온 손님들을 접대할 일이 자주 있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처음에는 멋모르고 유명 한정식집부터 예약했습니다. 그런데 입구에서 신발을 벗는 것조차 생소했던 그 중국 손님들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한 순간도 편하게 앉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G20 국가들 중 방석에 엉덩이를 깔고 책상다리로 식사를 하는 나라는 아마 우리뿐일 겁니다. 그런데도 이 도시의 대중음식점들은 가는 곳마다 신발부터 냉큼 벗고 올라와서 방석을 깔고 앉으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런 식사 자세는 소화불량 등 각종 내·외과 질환의 원인이라는 학계의 보고도 있는데 말입니다. 하긴 모름지기 식사는 방석을 깔고 책상다리를 틀고 해야 제격이고 품격도 높아진다고 하면 할 말이 없긴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다들 아파트 생활을 하고, 또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방석을 깔고 앉는 게 웬만큼 익숙해 있는 우리도 허벅지가 저리고 무릎이 쑤시는 판에 책상다리 자체부터 생소한 외국인들은 오죽할까 싶습니다. 그러니 외국손님을 맞을 때마나 의자에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는 마땅한 음식점을 찾지 못해서 곤혹스러울 수밖에요.

 

하여튼 전통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는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에서 국제교류 업무를 제대로 추진한다는 게 이래저래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