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모(大母) 김옥정 삼성원 이사장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들어갈 때 가장 기뻐"

41년간 고아들 보육… 2000여명 길러 사회 배출 / 가정폭력, 서로 참고 배려하고 감싸주면 문제없어

▲ 김옥정 삼성원 이사장은 성폭력 문제는 특정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개연성이 있어 성범죄자는 전자발찌 정도가 아니라 특별한 관리대책을 세워야한다고 말했다. 안봉주기자 bjahn@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한 평생 부모없는 아이들과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위해 헌신해 온 김옥정 삼성원 이사장(82). 지난 6월말로 41년간 봉사해 온 삼성보육원 원장직을 내려놓았지만 여전히 어려운 아이들과 여성들을 위한 일만은 쉬지 않고 외길 인생을 걷고 있다. 사실 김 이사장의 외가와 부모는 일제치하 때 대한민국 독립운동을 이끌어 온 애국지사들이지만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다. 큰 외삼촌은 지금의 국회의장 격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김인전 목사이고 전라북도 지사로 재임하다 6·25 전쟁때 순국한 김가전 목사가 작은 외삼촌이다. 부모들도 전주 3·1운동을 주도한 외삼촌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투사 이지만 '집안 일을 내세우지 말라'는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그 공적이 가려져 왔었다.

 

그 같은 가풍 때문인지 김 이사장도 인터뷰 요청에 "낯 간지럽다. 자랑하기 위해 한 일이 아니다."며 한사코 고사했지만 기자의 무례한 무단 침입(?)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김 이사장을 전주 효자동 사회복지법인 삼성원 사무실에서 만났다.

 

-지난 6월말로 41년간 맡아왔던 삼성보육원 원장직을 그만두셨는데 평생을 헌신해 온 보육사업에서 은퇴하신 소회는.

 

"나 좋아서 한 일인데 헌신은 무슨 헌신…. 내가 내 놀이터를 잘 만난 것이지 자랑할 거리는 아니예요. 아이들을 보면 꼭 꽃봉오리 같아요. 물주고 잘 보살피면 예쁘고 사랑스럽게 피는 꽃 같죠. 아이들을 데려다 10여년을 함께 보내면 어느새 청년이 되고 20년이 지나면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죠. 그렇게 잘 성장하는 모습들을 보면 아이들에게 고맙죠. 은퇴했다고 하지만 지금도 시간 되는대로 나와서 사무적인 일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만두어야 하는데 하면서도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아이들과 가정폭력을 당하는 여성들을 위해 평생을 일해 오셨는데 어떻게 이러한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까.

 

"어려서 예수병원 뒷동네에서 살았어요. 이웃에 목사님 선교사님 등 훌륭하신 분들이 많이 사셨는데 그 분들의 삶을 통해 많이 배웠죠. 나도 저 분들처럼 살았으면 하고요. 또 저희 집이 잘 산 것은 아니지만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와 기전학교 교사이신 어머니로부터 가정교육을 잘 받았습니다. 그러나보니 자연스레 부모없는 아이들과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됐죠."

 

-삼성보육원은 어떻게 운영하게 되었나요.

 

"간호대학을 다닐 때 6·25 전쟁이 터져 학교를 못 다니고 군산에서 유치원 교사로 7년 정도 다녔어요. 그 뒤에 삼성보육원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했어요. 아이들을 돌보면서 빨래도 해주고 밥도 해주면서…. 그런데 보육원 원장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바람에 마땅한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보육원 운영을 떠맡게 됐습니다."

 

-여자로서 한 둘도 아니도 100여명이 넘는 아이들을 돌보는게 쉽지 안았을 텐데요.

 

"당시에도 아이들이 130여명 정도 보육원에서 생활했죠. 그런데 힘들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들었어요. 아이들도 착하고 말도 잘 듣고 제 기억에 아이들이 큰 사고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평생동안 아이들을 때려본 적이 없으니까요. 또 내 아이처럼 모든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내 자녀들과 똑같이 대해주었죠."

 

-그 많은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려면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운영하시는데 어려움은 없었는가요.

 

"제가 먹고 쓰는 것 외에는 모두 아이들 보육하는데 들어갔죠.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누군가 희생이 없이는 운영을 할 수 없습니다. 내 것을 내 놓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죠."

 

-지난 1985년에 사회복지법인인 삼성원에 전 재산을 후원하셨지요.

 

"나 잘 먹고 잘 살려고 보육사업 한 일이 아니고 내 자랑 할려고 하는 일도 아닌데 그런 것은 물어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지금까지 삼성보육원에 들어와 성장해서 나간 아이들은 얼마나 되는가요.

 

"글쎄요. 정확한 숫자 통계를 내보지 않았는데…. 한번 들어오면 대략 10~20년 정도 여기서 생활하다 자립하니까 그동안 2000여명은 넘을 것 같아요."

 

-지나온 일들이 힘들었겠지만 보람도 크시겠습니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올바르게 성장해서 건강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목회자나 사회복지 분야로도 많이 진출했죠.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갈 때가 가장 기쁘죠. 밤 새워 공부할 때 라면이라도 배불리 먹이지 못하고…. 제대로 간식거리도 챙겨주지도 못했는데….(금새 눈시울이 붉어져 말을 잇지 못해 이야기를 잠시 중단했음)

 

-밖에 나가면 인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겠는데요.

 

"시내나 마트에 나가면 '할머니'하고 좇아오는 아이들이 많아서 고개를 못들고 다녀요. 택시를 타면 목소리로 알아보고 택시비를 안 받겠다는 아이들도 있고요. 그래서 택시를 타게 되면 행선지만 말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가요. 그래도 알아보는 아이들이 있는데 내릴 때 택시비는 뒷자리에 놓아두고 거스름돈은 아이들 과자 사다 주라고 하죠. 저희들은 반가워서 그렇겠지만 혹시 나 때문에 누가 되지 않을까 항상 조심스러워요. 그래서 요즘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외출도 안해요."

 

-이 곳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보육원을 후원하는 사람들도 있겠네요.

 

"제가 절대 못하게 합니다. 그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전혀 없어요. 아무런 기반이 없죠. 그런데 나 도와주겠다고 하다가 그 아이들이 스스로 자립하지 못하면 안되죠. 그래서 '나 도와주는 것은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으니까 너희들이 잘 살고 절대 가난을 대물림하지 말라'고 항상 당부합니다. 못하게 하니까 나 모르게 자녀들 이름으로 후원하는 아이들도 있는 것 같아요. 나중에 알게 되면 너부터 자립하라고 합니다."

 

-성장해서 보육원을 나가는 아이들에게 3가지를 꼭 당부하신다고 들었는데요.

 

"먼저 가장으로서,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라고 합니다. 자녀들을 너와 같이 보육원에 맡기는 일이 절대 없도록 말입니다. 또 국가와 사회와 이웃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마지막은 남의 것을 절대 탐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가정폭력이나 성폭력으로 어려움을 당한 여성들을 위한 쉼터도 만들어 운영하셨지요.

 

"1995년도에 정부에서 전국 시도마다 여성쉼터를 만들도록 했어요. 전라북도에서 마땅히 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제가 맡았죠. 1996년 9월에 여기 삼성원에다 쉼터를 개설했습니다."

 

-여성 쉼터는 어떤 사람들을 돌보는가요.

 

"여성 쉼터는 학대받은 여성들과 그 아이들을 위한 피난처죠. 주로 가정 폭력에 시달린 여성들과 성폭력 피해를 당한 미혼모들인데요, 각각 처한 상황과 여건이 달라서 돌보는데 어려움이 많죠. 특히 마음과 육체적 상처를 안고 살아 온 사람들이기에 치유하는데도 힘들어요. 하지만 어머니 같이, 할머니 처럼 대해주니까 지금까지 불상사는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부부 갈등 때문에 위기의 순간도 많았다고 들었는데….

 

"다투고 싸우고 하다보니 남편들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찾아오는 경우도 많이 있죠. 이 곳까지 가방 속에 흉기를 넣어가지고 오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는 내가 미리 알아채고 '아기 줄려고 과자까지 사왔구나'하면서 가방을 따로 맡아두죠. 그럴 때면 주위에서 '내가 예수 안 믿었으면 아마 점쟁이가 됐을 것이라고 그래요. 어떻게 그 가방 속에 흉기가 있는지 알았냐고….' 한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하면 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 많기 때문에 항상 긴장할 수 밖에 없어요."

 

-이 곳을 다녀간 여성은 얼마나 되는지요.

 

"매년 평균 100여명 정도 돌보고 있어요. 퇴소할 때 엄마와 아빠가 아이들 손잡고 함께 나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지금까지 대략 2000여명 정도 돌본 것 같아요."

 

-1998년에는 여성긴급전화 1366을 개설해서 운영했었죠.

 

"1366도 역시 정부 시책으로 설치 운영했는데요, 제가 13년 정도 하고 지난해 7월부터는 천주교유지재단에서 맡아 운영하고 있습니다."

 

-긴급전화를 하루 24시간 운영하려면 보통 힘들지 않았을 텐데요.

 

"상담원들은 주로 낮에 근무하고 야간 당직은 저 혼자 했어요. 그러다보니 전화대기 때문에 외출 한번 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긴급 상황이 주로 밤에 많이 발생해요. 부부싸움도 낮보다는 밤에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죠."

 

 

▲ 김옥정 이사장과 본보 권순택 선임기자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가정폭력의 주 원인은 무엇인가요. 문제점과 대책이 있다면….

 

"예전엔 주벽 등 이유없는 폭력이 많았는데 요즘은 주로 경제적 이유와 종교적 갈등이 많아요. 여자들도 책임감을 갖고 살아야 하지만 남편들도 아내를 어머니처럼 여겨서는 안돼요. 무엇이든 다 내 맘에 맞게 해주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안된다는 얘기죠. 서로 참고 이해하고 배려하고 감싸주면 문제가 있을 수 없죠. 그리고 제가 미국에 가봤더니 미국에선 가정폭력이 발생하면 남편을 격리하는데 우리나라는 남편은 집에 놔두고 여성과 아이들을 피난시켜요. 잘못한 사람이 큰 소리치고 집에 있다는 것은 모순이예요. 남자에게 문제가 있다면 일정한 장소로 격리해서 일정기간 순화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요즘 성폭력, 특히 아동 성범죄가 심각한데요.

 

"성폭력 문제는 특정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개연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 지경까지 온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인 동시에 국가도 정신차려야 합니다. 성범죄자는 전자발찌 정도가 아니라 특별한 관리대책을 세워야합니다. 성범죄자들 인권을 얘기하는데 몸과 마음에 평생 씻을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인격과 영혼까지 파괴하는 사람에게 인권운운 하는 것은 사치에 불과합니다. 인간을 존중할 줄 알고 법을 지키는 사람이라야 인권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저항능력이 없는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자는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마땅합니다."

 

-가족 이야기 좀 할까요. 명망높은 독립운동가 가문인데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전주 3·1운동을 주도한 김인전 목사와 김가전 목사가 외삼촌이고 어머니 김인애 선생님(1898-1970) 역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혹독한 옥고를 치르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외삼촌인 김인전 김가전 목사님이 3·1만세운동을 주도할 당시 어머니는 기전학교에 계셨는데 그 때 학생들 13명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치마폭에 숨겼다가 남문 인경 소리에 맞춰 장터로 나가 뿌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투옥됐죠. 6개월간 옥고를 치르셨는데 한 번은 추운 겨울에 여학생들을 밖으로 끌어내 무릎을 꿇리고 찬물을 온 몸에 부었다고 그래요. 그러니 치마까지 얼어붙어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고문 후유증 때문인지 노년에는 파킨슨병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셨죠."

 

-어머니께서 일경에 잡히시자 이름대신 가명을 써서 가족들이 면회 갔다가 못하고 돌아왔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두 오빠에게 누가 될까봐 김인애 라는 이름 대신에 최귀물이라고 외가 성씨에 아명을 댔다고 그래요. 가족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면회를 신청하니 그런 사람은 없다고 해서 면회를 못하고 가족들이 넣어준 옷가지 등 물건도 받지 못했다고 그래요."

 

-아버지 김종곤 선생님도 전주 3·1운동에 참여했다가 6년여동안 망명생활을 하셨었고 자녀들도 신사참배나 창씨개명을 안했다죠.

 

"아버님도 3·1만세운동 당시에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했다고 그래요. 또 저희들에게 일본말은 못쓰게 하셔서 초등학교에 1000여명이 다녔는데 우리 형제자매들만 창씨개명을 안했어요. 등교 때도 신사참배를 안하자 학교에서 가슴에 빨간 리본을 달고 다니게 했어요. 그리고 교장실로 불려가서 매일 정신교육을 받아야 했었죠."

 

-부모님께서 그렇게 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하셨는데 어머니 김인애 선생님만 지난 2009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어요. 왜 독립유공자 신청을 안하셨는지요.

 

"기전학교 출신으로 어머니와 함께 3·1운동에 참여했던 임영신 상공부장관이 전주 방문 때 독립유공자 신청을 권유했는데 아버님께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하는 일인데 신청할 필요가 없다.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면서 단호히 거절했다고 그래요. 어머니도 '가족들 이야기를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느냐'고 만류했기 때문에 안했죠. 그런데 몇년 전에 손자가 할머니의 독립운동 공적을 신청해서 어머니에 대한 독립유공자 지정이 이뤄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