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딸 기 - 김 규 희

신혼 초부터 나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아빠 엄마라고 불렀다. 시아버지는 내 이름을 불러주고 주변에는 며느리가 아닌 딸이라고 소개하곤 했다.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그런 아빠가 휄 체어에 겨우 의지하는 지금이다. 볼이 움푹 팬 아빠는 퀭한 눈으로 요양원 뜰에 눈을 주었다.

 

"아빠, 저게 뭔지 알아?"

 

"……산 ? 딸 ? 기."

 

소리는 폐 속 깊이 남겨둔 채 공기만을 내뿜는다.

 

"따 드릴까?"

 

아빠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나치게 농익어 금방 으깨질 것 같은 검붉은 알은 그냥 두고 붉은 빛이 투명한 큰 놈 너덧을 따서 손바닥에 올렸다. 산딸기 하나를 집는 손끝이 바르르 떨린다. 아빠의 손가락은 겨울 나뭇가지마냥 앙상하다. 마치 느린 영상 보기를 클릭한 듯하다.

 

2년전 아빠는 폐암선고를 받았다. 3~6개월이 시한이라고 했다. 그런 아빠가 지금껏 잘 버틴 건 기적에 가깝다고 한다.

 

이주쯤 전이었을까. 엄마는 '아빠 수발이 힘들다'고 하소연이다. 몇 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겨우 왼 손발에 의지하여 거동하는 엄마다. 그런 몸으로 맞벌이를 하는 우리부부를 대신하여 아빠수발을 도맡았으니….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사는 아빠에게 엄마는 우둔한 왼손발로 겨우 밥, 국, 반찬, 물을 하나씩 하나씩, 차례차례로, 한 끼 식사를 위해 주방과 방을 수차례 왕복 한다. 엄마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리라. 우리부부는 장고 끝에 아빠를 요양병원에 입원시켰다.

 

산딸기를 오물거리는 할아버지의 깡마른 두 다리를 작은 녀석이 주물려 준다. 분명 아빠도 내 남편의 어린 시절을 기억할 것이다.

 

딸기 넝쿨에는 연둣빛 덜 익은 알이 빼꼼히 매달려 있다. 어느 덧 초등학교 졸업반과 중학교 신입생이 된 내 아이들의 상큼한 모습을 참 많이도 닮았다. 아빠는 힘 없는 눈길로 당신 손자들을 어른다. 할아버지의 그 깊은 눈길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 둘이 할아버지의 다리를 주무른다.

 

"다리에 이렇게 살이 없어서 어떻게 걸으실 수 있겠어요. 식사 잘 하시고 빨리 건강해지셔야 잘 걷고 우리 집에 빨리 갈 수 있잖아요."

 

둘째아이의 목소리가 촉촉하다고 느낀 건 내 생각일까. 연둣빛 덜 익은 산딸기 같다. 그 곁에 큰 녀석이 듬직하게 서 있다. 주홍빛 맵시를 자랑하는 붉은 딸기처럼. 신혼 무렵 아빠는 강인하고 위풍당당했다. 빨갛게 농익은 자태를 자신만만하게 뽐내는 큰 녀석처럼 아빠는 항상 우뚝했다. 제 할아버지를 닮은 아들 둘이 나는 좋다.

 

요즘 남편은 아침저녁으로 요양병원을 찾아간다. '아버지의 큰소리가 그립다'며 한숨을 짓는 남편이다.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리지 않는다(…子慾孝而 親不待)'는 '한씨외전'(韓氏外傳)의 풍수지탄(風樹之嘆) 싯구가 자꾸 떠오른다고 푸념을 한다.

 

"아빠 맛, 있 ? 어…요?"

 

"……셔.……근데 맛있구나."

 

아빠의 목소리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맥이 없다. 어떤 시인은 죽음을 두고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썼다던가.

 

잎새 한 장을 담벼락에 그려 넣던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 새〉 속의 노 화가를 그려 본다. 스러져 가는 아빠를 어찌할 수 없이 바라만 보는 나는 그저 마지막 그 날까지 아빠가 꽃대를 단단하게 잡고 있기를 간절히 빌 뿐이다.

 

 

▲ 김 규 희

 

※ 수필가 김규희씨는 2001년 '지구문학'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현재 왕신여자중 교사(현 이일여중 파견)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