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고은의 자전적 소설 '나, 고은'에 나오는 대목이다.
군산출신인 시인은 어린 시절부터 동국사를 자주 찾았다. 6·25 전쟁 초기 좌우익 싸움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걸 봤다. 시체들을 파내 옮겨야 했다. 씻어도 시체 냄새는 가시지 않고 죽음이 늘상 붙어 다녔다. 이를 견디지 못하고 몇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그 후유증으로 한쪽 귀 고막을 심하게 다쳤다. 그 즈음 군산항 부두에서 검수원을 하다 군산북중학교 국어 겸 미술교사로 들어갔다. 19살(1952년)때다. 그리고 동국사에 머물던 객승을 만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남철에 끌리듯 그를 따라 출가했다.
그가 출가한 동국사는 일제 강점기때 우리나라에 세워진 500여 개의 일본식 절중 유일하게 남은 절이다. 1909년 일본의 최대 종단인 조동종(曹洞宗) 승려가 '금강선사'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일본 에도(江戶)시대 건축양식으로, 일본 사찰답게 지붕 물매가 75도로 급경사를 이룬다. 또 고온다습한 일본 기후의 영향으로 환기가 잘 되도록 사방에 창문을 두었다. 건물을 짓는데 사용한 나무는 쓰기목(삼나무)으로 일본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한국 전통사찰과 달리 단청 없이 담백한 것도 특징이다. 이 절은 해방 이후 동국사(해동대한민국의 절)란 명칭으로 바뀌었다. 조계종에 편입돼 선운사의 말사가 되었다.
이 절에서 16일 의미가 큰 행사가 열렸다. 일본 조동종 승려 이치노헤(一戶彰晃·64·일본 아오모리 운상사 주지) 등이 참석해 국내 최초로 참사비(懺謝碑)를 제막한 것이다. 내용은 "일본 불교는 국가권력에 영합해 태평양전쟁에 가담하고 수많은 아시아인들에게 인권침해, 문화멸시, 일본문화 강요 등 커다란 상처를 남긴 점을 참회하면서 사죄드린다"는 것이다. 조동종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도 관여한 바 있다.
과거사 왜곡, 정신대, 독도문제 등 갈수록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에 아직 양심있는 인사들이 있다는 점이 퍽 다행이다. 한일문화가 공존하는 동국사가 민간교류의 폭을 넓히는 끈이 되었으면 한다. 조상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