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담 쌓았던 시인, 20년만의 고해성사…유천리 첫 시조집 '천마비상도'

책을 편다. 목차가 나온다. 그 다음은 서문 혹은 '들어가며'다. 그래야 독자가 책을 볼 엄두를 낼 수 있으니 말이다. 그걸 거치고 나면 비로소 본문이 시작된다. 그런데 유천리(본명 유광일) 시인의 시조집'천마비상도'(화암출판)에는 그런 게 없다. 목차 다음에 바로 시조 '설목'이 불쑥 독자를 끌고 갔다.

 

'가지 끝 하늘 열어 앵겨도는 부신 빛살 / 앙가슴 꿈을 붉힌 새들도 불러 앉혀 / 온 종일 속 타는 이야기 / 귀가 먹듯 벙근다.'

 

김제에서 태어나 법원에서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아오던 그는 20년 넘게 시를, 시조를 쓸 수가 없었다. 시집'꿈꾸는 철마를 위하여'(화암출판), 시조집'천마비상도'는 그간 문학과 담을 쌓아온 스스로를 위한 문학적 고해성사.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시조 부문으로 등단한 이후 줄곧 '슬럼프'를 겪은 그에게 비로소 숨통을 트여준 것일 게다.

 

그는 "내 속 가슴의 비밀한 영토에서 혼자 핏무늬의 꽃을 피우던 그 날들의 목타는 영가를 부끄러운대로 내어 보이고 싶었다"고 했다.

 

당분간 나이도, 사진도 공개하지 않겠다던 이 기인은 출간 준비 중인 장편소설'달이 뜨는 호반'이 나올 때엔 모든 걸 다 밝히겠노라고 했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제대로 담은 시를, 시조를 쓰고 싶어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에서 유교경전학을 전공했을 만큼 역사의식이 깊다.

 

그간 역사의식과 호흡하면서 침묵으로 소통해왔던 작가가 이제 자신을 치유했던 작품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침묵과 절제, 고요로의 초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