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종자들이 사라지고 있다. 외환 위기 이후 종묘회사들도 외국기업에 넘어갔다. 우리 토종 씨앗도 이젠 로열티를 주고 사와야 하는 실정이다. 그래서 '종자주권' '식량주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종자산업. 부가가치가 높은 유망 업종이다. 농업비중이 높은 전북은 종자산업을 꽃 피울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지만 아직은 인프라가 취약하다. 최근 들어 방사선 육종연구센터와 민간 육종연구단지를 유치하는 등 종자산업에 눈을 뜨고 집적화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도민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농촌진흥청과 산하 관련 기관, 한국농수산대학이 전주혁신도시에 이전해 오면 생산과 연구, 인력공급이 본 궤도에 오를 것이다.
우리나라 종자은행 개설의 산파역을 했고 유전자원 연구에 몰두했던 안완식 박사(70)를 만났다. '토종 지킴이'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지금도 전국 각지를 찾아다니며 토종 종자 발굴에 심혈을 쏟고 있다. 인터뷰는 경기도 화성에 있는 그의 자택 서재에서 이뤄졌다. 토종 종자와 종자산업을 주제로 얘기를 나누었다. 종자산업 메카의 꿈을 키우는 전북에 대한 조언도 궁금했다.
-토종 씨앗 살리는 의병대장, 토종지킴이, 토종연구분야 최고권위자 등 별칭이 많습니다. 부담은 없나요.
"종전에는 무덤덤했는데 근래에는 부담되기도 하고 책임감마저 듭니다."
-한자 성함 安完植을 풀이하면 이름 대로 세상을 사시는 것 같습니다만.
"완식이란 이름은 지관을 하셨던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셨는데 살고 보니 '완전하게 심어서(完植) 큰 탈 없이 편안하게(安)' 살아온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토종이란 말을 매우 좋아하는데 역설적으로 토종 종자들을 지키지 못하고 있어요. 특히 외환위기 때 심했는데 어떤 실정입니까.
"당시 국내 채소 종자시장의 67%를 차지했던 서울종묘, 흥농종묘, 중앙종묘 등이 외국 유명 종묘회사인 몬산토, 신젠타, 다끼이 등에 인수합병됐어요. 몬산토 같은 글로벌 회사는 우리나라 농산물 종자사업권의 대부분을 흡수했어요. 우리나라를 발판 삼아 중국에 진출하려 한 것이지요. 결국 우리 밥상에 오르는, 우리 땅에서 길렀던 채소 대부분을 이젠 로열티를 물고 먹어야 하는 실정입니다."
-우리 기업이 되찾아 온 경우는 없나요.
"동부팜한농이 얼마전(9월11일) 몬산토코리아를 인수했어요. 청양고추를 포함한 고추와 토마토·파프리카·시금치 등 310개 종자 중 20%를 제외한 250개 종자사업권을 되찾게 된 겁니다. 참으로 다행이지요."
-우리 토종들이 사라지는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국내외의 새 품종이 보급되면 농가들은 품종을 바꾸게 되니까 먼저 심었던 토종들은 사라지게 돼요. 농촌 일손 부족도 토종 소멸을 부채질한 원인입니다. 1985년 토종을 수집했는데 8년 뒤 같은 지역에서 같은 방법으로 다시 조사했더니 74%나 소멸됐고, 다시 7년 뒤에는 12%가 소멸된 것이 확인됐어요."
-토종 종자연구에 심취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려서부터 식물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농대를 지원했고요. 토종과의 인연은 1983년 일본 쯔꾸바 과학도시에 있는 농업연구센터에서 3개월 동안 식물유전자원에 관한 연수를 받은 것이 계기였어요. 귀국 후 식물유전자원 연구를 하라는 청장의 지시로 종자은행 업무를 시작했고, 이때 우리나라 농업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뭔지를 고민했어요. 결국 사라져 가는 토종을 수집, 확보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책도 쓰기 시작했지요."
-전국을 돌아다니며 토종 발굴에 매진하고 계시는데 성과는 좀 있습니까.
"도시화가 빠른 지역일수록 토종을 찾아보기 힘들어요.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군 지역을 빠짐 없이 조사하면 300∼400점 정도는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전 정읍지역에서 토종종자를 살펴보고 가셨는데 다른 지역에는 없는, 전북에만 있는 토종도 있나요.
"전국여성농민회 정읍회원들과 함께 옹동·태인·정우·이평면에서 활동했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많은 토종을 볼 수 있었어요. 콩·녹두·팥·돈부·강낭콩 등 두류 토종이 많고 상추·시금치·호박·오이·갓 등의 토종 채소와 메밀·땅콩·참깨·들깨 등의 유류 작물 토종도 다양했습니다. 특히 대를 이어 심어온 뿔시금치·검은찰옥수수·감자·녹두·시금자깨·청호박 등이 오래된 토종들이었습니다. 전국 어디나 그곳에서만 나는 토종은 거의 없고 같은 작물이라 하더라도 그 지역에 나는 품종은 그 지역에서 적응되어 온 그 지역만의 토종입니다."
-토종을 발굴하고 가꾸는 철학이 있을 텐데요.
"처음엔 의무감에서 시작했지만 나중엔 몸에 배면서 재미를 느껴요. 토종을 수집하고 사진 찍고 정리해서 책으로 펴내면 자신감도 생기게 돼요. 토종은 한번 사라지면 다시 찾을 수 없는 귀중한 자원이고,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영원해야 한다는 소신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거지요. "
-토종은 수량이 적고 모양이나 품질이 떨어지는 문제점도 있지 않나요.
"개량품종에 비해 수량성이 낮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질을 더 따지지 않습니까. 토종 맛이 우리 입맛에 맞기 때문에 토종을 선호하는 예가 많아요. 넓은 면적에서는 개량종을 재배해 다수확을 올리고, 토종은 유기농 재배에 적합하기 때문에 넓지 않은 면적에서는 토종 유기농산물을 재배한다면 그만큼의 가치를 가격으로 보상받을 수 있겠지요."
-농업비중이 높은 전라북도는 지금 종자산업의 발판을 다지고 있습니다. 오랜 유전자 연구원 생활을 하셨는데 어떤 방향성을 갖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종자산업은 부가가치가 큽니다. 종자시장을 넓게 보아야 합니다. 안정성을 위해 내국시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되 중국과 동남아 등을 집중 공략하기 위한 현지 수요자 중심의 연구개발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현지인들의 입맛과 취향에 맞는 품종을 개발하려면 다양한 유전자원을 현지에서 확보해야 하고 연구소도 현지에 두어야 합니다. 그에 따른 체계적인 인력양성도 과제겠지요."
-종자산업은 다국적 기업이 장악하고 있는데 후발주자로서 가능성이 있을까요.
"동부팜한농이 몬산토코리아를 인수해서 다행이지만, 되찾지 못한 20%는 우리 채소의 핵심이 되는 고추·파프리카·시금치·토마토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배추·무·고추육종은 한국 연구진이 세계에 앞서 있고, 고추 연구기술은 파프리카나 토마토 연구와도 상통하는 것이어서 연구개발 투자를 늘린다면 가능성은 크다고 봅니다."
-농촌진흥청 재직 시절 종자은행에 관심이 많으셨는데 종자은행은 잘 운영되고 있나요.
"1974년 종자저장시설(5만점 보존 규모)을 신축했고 농촌진흥청 연구기관에 보유하고 있던 종자 3만3000점을 이곳에 저장했지요. 이 일을 시작하면서 전국의 농촌지도소 요원 7000여명을 동원해 토종을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이 때 5170점을 수집했는데 이것이 지금 보유하고 있는 토종의 근간이 되고 있지요. 2006년에는 종자저장시설인 '국립농업유전자원센터'가 최첨단 무인관리(로봇) 시스템으로 수원에 건설돼 국내 유전자원 16만점을 보존하고 있어요. 국제식량농업기구(FAO) 공인 안전중복보존센터로 지정돼 아시아 지역의 '유전자원 허브뱅크'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농촌진흥청이 전주혁신도시로 이전해 오면 이 시설도 같이 따라 오게 됩니까.
"아니예요. 이 시설은 수원에 보존되고 전주혁신도시에는 새로 지어질 겁니다. 조선시대 여러 곳에 보관해 안전을 도모했던 사고(史庫)와 같은 이치이지요."
-전북은 방사선육종연구센터와 민간육종연구단지를 유치했습니다. 종자의 다양성이 기대되는데 향후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100여년간 수원이 농업연구기관이 집결 지역으로서 성과를 거두었듯이 전북도 육종연구기관이 집적화되면 큰 성과를 거둘 것으로 봐요. 다만 연구기관 간 연계체제가 원활해야 하고, 시설 및 기자재 활용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사전 연구인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방사선 육종이 부가가치가 높을 것으로 전망되는데 예를들면 어떤 품목들이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미국 일본 중국 등 방사선돌연변이 육종 선진국을 따라 잡으려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해요. 방사선돌연변이는 종자에 의한 생산물을 이용하는 곡물의 육종 보다는 영양체를 이용하거나 영양체로 번식하는 작물에서 효과가 잘 나타납니다. 다양한 품목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한다면 좋은 결과가 도출될 수 있어요. 방사선돌연변이 육종에 대한 오해와 막연한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도 숙제입니다."
-자치단체가 해야 할 일을 꼽으신다면.
"자치단체 힘만으로는 종자산업을 발전시킬 수 없어요. 정부의 육종 연구기관과 민간 육종연구기관들이 부단히 노력해야 해요. 이들 연구기관들이 어려움 없이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행정적인 배려와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 자치단체로서는 중요한 일입니다."
-적기 예산지원 등 정부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할 터인데요.
"정부 차원의 큰 사업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겠어요?"
-인력확보와 양성도 중요한 과제일 텐데 현재 우리나라 인력풀은 잘 돼 있나요.
"우리 학력수준은 세계 제일입니다. 외국의 유명한 대학에서 수학한 석학들도 많아요. 인력풀은 충분하지만 중요한 건 대우예요. 훌륭한 대우가 우수한 인력을 낳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구촌이 농업 유전자원을 선점하기 위한 종자전쟁시대를 맞고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 수준입니까.
"현재 세계 6위의 농업유전자원(27만2000점)을 확보하고 있어요. 앞서 얘기한 것처럼 '세계종자안전중복보존소'로 인증 받고 또 '국제유전자원협력센터'를 설치하는 등 선진 인프라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천연의약소재, 기능성 신소재, 식품소재, 바이오 에너지작물, 아열대 과수 및 미생물 자원 확보에 주력해 2017년에는 세계 5위의 유전자원을 확보할 예정입니다. 2020년까지 세계 종자시장의 선두그룹에 올라서겠다는 계획을 세운 만큼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종자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신성장 동력사업이 될 겁니다. "
-우리나라 민간기업의 종자산업은 어느 수준입니까.
"토종 메이저급으로는 동부팜한농과 농우바이오, 한농종묘 등이 있어요. 주로 채소류와 화훼류 종자를 취급하고 있는데 상당히 많은 유용한 유전자원을 보유하고 있고 경쟁력도 있습니다. 사까다종묘, 다끼이종묘 등 100년 이상된 육종기술을 갖고 있는 일본을 제외하면 국내 육종기술 수준은 거의 세계적 수준입니다."
-육종 문제는 결국 인프라가 많은 농촌진흥청이 주도해야 하고 기업들도 육종연구에 투자를 해야 할 터인데 잘 될까요.
"농진청은 정부 연구기관으로서 당연히 새로 형성되는 종자산업 클러스터 발전에 일익을 담당해야 해요. 민간 기업 투자를 유도하는 일에도 마찬가지이고요."
-전북에는 방사선육종연구센터-민간육종연구단지-농촌진흥청·농수산대학-국가식품클러스터 등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종자 육종산업의 메카라는 말이 벌써부터 나오는데 과제라면 무엇을 들 수 있겠습니까.
"종자 육종산업의 메카로 발전하려면 무엇보다 외국 회사에 대적할 만큼 경쟁력을 갖춰야 해요. 외국산 품종에 뒤지지 않는 상품성 높은 종자를 개발해야 하고, 국내는 물론 수출용 종자를 육성해야 합니다. 사전 연구인력과 자원 확보도 중요하고요. 전북은 고급 인력이 올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행정편의를 제공하면서 일하기 쉽게 원스톱 지원체제를 갖춰야 합니다. 정부도 관련 산업 및 업체에 대한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고."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열심히 살아야지요. 팔자소관이랄까요, 눈 감기 전까지는 종자분야에 진력할 생각입니다. 15년 전 창립한 '한국토종연구회'와 '토종씨드림' 활동을 통해 토종을 찾아 종자은행에 보존하고 확산시킬 거예요. '한 농가 한 토종 갖기운동'으로 승화시킬까 합니다."
안봉주기자 bja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