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연구소 이사장
4·19를 고등학교 때 겪었고, 대학 때는 6·3한일회담 반대 투쟁으로 날을 세웠다. 그런 와중에 '신망 잃은 박 정권 하야를 권고한다'는 시위로 학생의 몸으로 구속되고 말았다. 오래지 않아 풀려났으나, 한·일협정 비준에 반대하고 월남파병 반대 시위에 앞장서다가 두 번째로 구속되는 비운을 맞았다. 몸이 풀려나오자 입대 영장을 받고 강원도 전방에서 3년 세월을 보냈다. 제대 후 다시 대학생이 되어 3선개헌 반대의 시국에 기웃거리다 대학원에 입학했다. 대학교수가 되려고 몸을 굽히고 이 눈치 저 눈치 보고 있을 때, 영구독재가 완전무결하게 자리 잡는 유신이 선포되고 말았다.
정말로 암담했다. 계엄령이 선포되어 국회가 해산되고 헌법까지 확실하게 중단되어 한 사람의 말이 법인 현실을 말똥말똥한 눈으로 지켜보던 그때, 참으로 분하고 기가 막혔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아니, 이런 것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어야 된다는 것인가.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따위 통곡이 어떤 힘을 발휘했으랴.
계엄군이 온갖 권력을 장악한 그때, 맨주먹인 국민들이 무슨 용맹을 부릴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나의 모교 전남대학교에서는 마침내 그해 12월 초 유신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함성'이라는 지하신문이 학교와 시내의 곳곳에 뿌려지는 쾌거가 일어났다. 죽음을 각오한 내 후배 대학생들이 일으킨 거사이자 의거였다. 주동자들은 또다시 '고발'이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살포하려다 끝내 잡히고 말았다. 이렇게 뚜렷한 역사적 사실이 있지만 지방인 광주에서 일어난 일인데다 일체의 보도가 관제된 탓으로 크게 알려지지 않아, 최초의 반유신운동은 1973년 4월의 부활절에 일어난 개신교 목사들의 거사로만 알려진 것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역사이다.
고등학교 교사이던 나는 영문도 모르고 잡혀가 경찰국 공작분실의 지하에서 숱한 고문과 강압에 의해 '함성'과 '고발'을 제작하여 국가반란을 예비 음모한 수괴로 둔갑되고 말았다. 내가 잘 알고 지내던 동지이자 후배들이 했던 일인데, 나를 지령한 수괴라고 시나리오를 만들어 기소하고는 감옥 독방에 처박아 버렸다. 교수가 되려던 꿈과 희망은 무너지고, 고문에 망가진 몸만 남아 앞이 캄캄한 세월이 그 시절이었다. 고등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아픈 몸을 이끌고 출소하였으나 검찰의 상고가 기각돼 무죄가 확정되기까지 3년이 걸렸다. 그 사이에 민청학련사건이 일어났고, 긴급조치가 마구 발동되면서 나의 삶은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한 세월을 이어가야 했다.
생사람을 잡아다가 고문으로 간첩도 만들고 역적으로도 만들어 인생을 파탄시키고, 통치자 한 사람만 천하의 자유를 누리며, 그의 추종자들만 한세상 만났다고 삶을 구가하던 시절이 유신독재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 40년이 흘렀고, 그 종말을 고한 지가 33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런 과거사가 말끔히 정리되지 못하고 이러쿵저러쿵 논란이 되고 있으니, 이런 기막힌 세상이 지구의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구국의 결단이었다느니,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느니 하는 본심을 토로해 놓고, 국민적 압력 때문에 마지못해 말을 바꾸고 있지만 그런 말에 진정성이 있다고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 무서운 것은 총도 아니고 칼도 아니다. 역사는 반드시 진실만이 승자가 된다. 시간이야 아무리 지연되더라도 결코 역사적 정의와 진실만은 묻히지 않는다. 역사에 맡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역사란 어떤 것인가. 역사에 기록되는 진실과 정의가 바로 춘추필법이다. 진실과 정의의 힘은 모든 권력과 역사를 뒤엎을 수도 있지만 거짓과 불의에는 무서운 필주(筆誅)를 내리기도 한다. 유신이 불가피했고 옳았으며, 독재가 경제를 발전시켰다고 믿는 사람들, 춘추필법은 거짓과 불의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한다. 역사는 세월이 지났다고 관대해지지 않는다. 필주는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