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계수록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는 '우반동'으로 불리는 마을이다. 우반동은 '실학의 비조' 반계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반계서당'을 짓고 말년을 보내며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완성한 곳이다. '반계'는 우반동을 가로 지르며 흐르는 냇물의 이름. 서른두 살에 이곳에 들어와 정착한 유형원은 그 이름을 따 호로 사용했다.

 

반계는 명문가 출신의 서울태생이다. 그의 부친 또한 한림학사로 이름을 날리는 학자였지만, 인조대에 광해군의 복위를 꾀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자결했다. 반계 두 살 때였다. 반계는 이후 집안 어른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학문을 익혔지만 벼슬보다는 산야에 묻혀 지내는 삶을 선택했다. 젊은 시절, 그는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살았다. 병자호란 때 피난 갔던 원주를 비롯해, 경기도 지평과 여주, 함경도, 금강산, 호남 등 여러 지역에서 짧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때의 경험은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계는 비록 초야에 묻혀 살았지만 글이나 읽고 책만 쓰는 만년서생이 아니었다. 세상을 걱정하고 나랏일을 근심했으며 현실적 문제를 분석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정책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펴낸 것이 '반계수록'이다. 반계는 '그때그때 보고 들은 것을 모아 쓴 기록(수록)'이라고 겸손한 이름을 붙였지만 이 책은 양란을 겪으면서 피폐해진 조선사회를 개혁하고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개혁안을 제시한 대작이었다.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로 통일할 것', '사간원을 폐지하고 사헌부로 통일할 것', '경연과 예문관을 폐지하고 홍문관으로 통일할 것', '의금부를 폐지하고 형조를 강화할 것', '왕실 소유의 막대한 장토(庄土)와 노비를 관리하는 내수사를 폐지할 것' 등등 국가의 세금과 교육, 군사, 신분제도 등에 걸친 방대한 개혁안은 아쉽게도 당대에는 실천되지 못했다. 그가 재야에 묻혀있었던데다 그 내용이 파격적이고 급진적이었기 때문이었다.'반계수록'이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수십 년이 지난 후다. 기록에 따르면 1760년 영조는 '반계수록'을 '경제에 관련한 탁월한 저술'이라 평가해 간행하게 했다고 한다.

 

대선을 앞두고 '경제민주화'가 화두다. 대선 후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제시하는 정책들을 보니 이미 수백 년 전에 시대를 통찰했던 '반계수록'에 담겼던 개혁안과 닮은꼴이 적지 않다. '반계수록'의 개혁안이 당대에 실천되었다면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