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의 정신 기리자"… 그러나 미완의 민주 성지

① 김주열 열사가 남원땅에 잠들어있다 - 4·19 혁명 불 지폈는데 추모공원화사업 아직은 초라

▲ 김주열 열사의 묘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김주열 열사의 고향은 남원. 열사의 뼈와 살 그리고 정신은 고향 땅에 묻혀 있다. 하지만 민주정신을 배울 수 있는 역사의 장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예산 및 관심 부족 등으로 인해 열사 추모공원이 초라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최근 추모곡 '남원땅에 잠들었네'의 작사가인 차경철(76·부산 기장군 정관면) 씨가 "열사의 고향이 곧 민주화 성지"라며 원곡 제작본 CD를 남원에 기증하면서, 다시 관심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민주화라는 소중한 유산과 함께 호흡하면서도, 그 가치를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닌지…. 남원은 이제 그 관심을 자긍심으로 이어가야 한다. 그리고 국가는 김 열사가 '영원한 민주의 횃불'로 고향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 민주화 성지의 토대는 분명 그 위에서 구축되기 때문이다. 본보가 3회에 걸쳐 김주열 열사와 추모공원화사업을 진단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편집자주

 

"살아서는 사랑스런 남원의 아들이 죽어서는 자랑스런 마산의 아들이 되어, 역사에서 민주의 화신이 되신 열사의 숭고한 뜻을 기린다." 남원 광한루원 인근에 세워진 '김주열 열사 흉상'에 새겨진 내용이다.

 

흉상의 내용처럼 김주열 열사는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출생시기와 관련해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제적등본과 열사의 생가에는 1944년 10월 7일로 기록돼 있지만, 인터넷 포털과 각종 언론보도는 1943년으로 명시하고 있다. 열사의 정신을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점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열사는 고향에서 용정국민학교와 금지중학교를 졸업한 뒤 1960년에 마산상고로 유학길에 올랐다. 김 열사는 같은 해 3월15일에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되고 나서 27일만인 4월11일 오전 11께 마산 중앙부두에서 오른쪽 눈 부위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시신으로 떠올랐다.

 

경찰의 삼엄한 경비 속에 4월13일 밤 11시, 열사의 시신은 구급차에 실려 고향인 남원으로 옮겨졌다. 마산을 떠난 구급차는 4월14일 새벽에 남원에 도착했고, 가족과 친인척들이 한줌씩 흙을 관 위에 뿌리며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고 한다. 열사의 어머니인 권찬주씨는 "당시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자"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열사는 그렇게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고, 남원땅에 잠들어 있다.

 

그리고 46년의 세월이 흐른 뒤, 고향인 남원에서도 열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움직임이 잇따랐다. 2006년부터 열사 묘 정비와 함께 추모각 및 기념관이 건립됐고, 2009년 11월에는 생가가 복원됐던 것. '열사 추모공원화사업'으로 불리는 이 사업에 투입된 예산은 국비 5억4000만원, 도비 2억원, 시비 7억800만원 등 14억4800만원으로 집계됐다.

 

남원시 관계자는 "열사 출생지와 묘가 있는 이 추모공원은 한국 민주주의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미래 가치를 전망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며 "하지만 추모공원화사업은 현재 미완의 상태"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