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형두 교수는 - '제임스 딘'초상권 사건 담당…문광부 표절위원장

본적은 고창이지만 태어난 곳은 부안이다. 개인사업을 했던 아버지 덕분에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자란 그는 부안초등학교 5학년, 어린나이에 유학을 가 줄곧 서울에서만 살았지만 깊은 가족애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고향 부안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어린나이에 부모님 곁을 떠나 큰 누이와 함께 서울살이를 해야 했던 그는 고향집에 갈 수 있는 방학만 기다리면서 외로움을 견뎠다.

 

그래서인지 고향 부안은 늘 그리움의 공간으로 남아있다. 엄혹한 군부독재 시절, 최루탄 가스 가득한 캠퍼스를 탈출하고 싶었던 그는 서울대 법대 2학년 때부터 서울맹학교의 고등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인연으로 장애인 복지에 관심을 갖게 됐다. 86년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나 판검사는 거치지 않고 곧바로 변호사가 됐다. 당초 일하고 싶은 로펌이 있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20여명 변호사가 소속되어 있던 중소규모의 법무법인 '광장'에 자원해 들어갔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사무실이 큰 규모의 로펌과 합병하게 되었다. 그곳이 바로 그가 일하고 싶어 했던 로펌이었다. 변호사 3년차였던 94년, 한 의류업체의 제임스 딘 초상권 사용과 관련된 사건을 맡게 되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저작권에 눈뜨게 됐다. 1997년부터 LL.M.(법학석사)과정을 거치면서 내친김에 워싱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뉴욕 주 변호사 시험에도 합격했다. 박사과정은 그의 의지라기보다는 경험을 위해 선택한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의 삶을 크게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박사학위논문은 저작권을 다룬 'The Right of Publicity in the Global Market'. 그가 학위를 마칠 무렵, 한국은 '한류' 열풍으로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저작권에 대한 관심이 부상해있었다. 자연히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저작권법 권위자이자 특히 엔터테인먼트 법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그는 바빠졌다.

 

귀국 후 지적재산권, 특히 저작권 분야에서 돋보이는 활동을 해온 그는 2005년 연세대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치열한 승부가 전부인 직업에 대한 회의로 갈등을 겪고 있을 즈음이었다. 고액 연봉의 변호사 생활 16년을 기꺼이 접고 대학 교수가 되었다.

 

학문으로서의 저작권 뿐 아니라 저작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확산시키는 운동에도 열정을 쏟아온 그는 저작권위원회와 개인정보분쟁조정위원회 위원,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이사 등을 지냈으며 지금은 문화체육관광부 표절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올해 안식년을 맞아 독일과 미국에서 방문학자로 짧게 생활하고 돌아왔는데, 학문의 큰 변화와 발전에 자극을 받았다. 그만큼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