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집 아이들은'전과'나'수련장'을 사서 공부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 학생들은 참고서를 살 형편이 못 되어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했다. 부모님들은 교과서를 열심히 익히고 선생님 말씀만 잘 들으면 된다고 믿었다. 사실 그 생각이 옳을 수도 있었다.
어쩌다 만화책 한 권이라도 빌려본다면 운이 좋은 날이었다. 만화가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 리'같은 책은 인기 최고였다. 내용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 또 읽고 눈물을 짜고 그랬다. 중학생 때 읽은 알렉산더 뒤마의'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지금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처음엔 '암굴왕'이라는 제목을 달았는데, 시골 소년에게 큰 꿈을 심어주었다.
고교 시절엔 안현필의 '메들리 삼위일체 강의'가 그렇게 갖고 싶었다. 그러나 수업료와 하숙비, 생활비 등이 만만찮게 들어가는 형편에 욕심을 내지 못하였다. 민중서관에서 발행한 '영어사전'을 대학생 때 헌책방에서 구입했으나, 얼마 쓰지 못하고 서울 성동역 부근의 막걸리 집에 잡혀먹었으니 그때부터 볼 장 다 보았다. 지금이야 그럴 일이 없지만, 예전엔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술집에서 책이나 학생증을 잡혀주었다. 그렇다고 없던 돈이 갑자기 생길 리 만무하니 잡혀두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학 1학년 때 골탕 먹은 책이 있다. 강모 교수님이 원서강독 시간에 교재로 '민주주의와 교육'을 선정하였다. 존 듀이의 저서로 당시 교육학의 필독도서였다. 책값이 꽤 비쌌고 헌책도 구하기 어려워 베껴 적는 수밖에 없었다. 복사기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 학기 동안 겨우 50여 쪽 배우면서 애를 먹었다. 돌아보니 학생 시절에 문학과 철학 서적을 두루 섭렵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나는 가끔 시내에 나가 서점을 둘러본다. 가급적 신간서적은 구입하지 않는다. 있는 책도 버리고 있는데, 굳이 비싼 돈 들이고 싶지 않아 헌책방을 순례한다.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일전에 수필집 두 권을 5천 원에 샀다. 이제는 갖고 싶은 책은 별로 없다.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그동안 써서 모은 글을 엮은 수필집 몇 권을 갖고 싶다. 작품성이야 떨어지면 어떻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으면 어떠리. 나의 생각과 경험을 글로 남겨 가족과 친지들에게 나눠주고 싶다. 가능하다면 어느 정도 인정받는, 수준 있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을의 끝자락에 겨울이 매달려온다. 겨울도 독서하기 좋은 계절이다. '쉴 곳을 찾아 세상을 뒤지고 찾아 헤맸더니,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이 없더라.'는 이탈리아 움베르토 에코 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오늘은 시립 도서관에서 빌려온 독일 작가 라이너 랑너의 '남극의 대결, 아문젠과 스콧'을 읽었다. 최초의 남극 탐험에 성공한 아문젠의 업적도 중요하지만, 두 번째로 남극점을 밟고 돌아오다 전원 동사한 스콧의 탐험대에게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콧구멍이 새카매지도록 호롱불 심지를 돋우며 책을 읽던 어린 시절의 긴 겨울밤이 그립다.
※ 수필가 김현준 씨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수필집 '이젠 꼴찌가 좋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