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무리
극명(克明)한 가을 햇볕.
한 움큼의
차고 시원한
청정한 물.
숲에서 발산하는
신선한 한 줌의
맑은 바람.
혼탁한 열기(熱氣)
법석이는
저자거리 너머,
흔들리는 가지
반짝이는 잎새 위에
해맑은 한 떨기 푸르름.
짙푸름 끝에 너울대는
눈부신
한 줄기 빛의 이랑.
- '한 줄기 빛의 이랑' 전문
'햇볕- 물- 바람- 푸르름- 빛'으로 이어지는 시상은 한 마디로 만물제동, 곧 노장의 물화계에 다름이 아니다. 이 시야말로 '진실한 나의 자화상'이라고 한 최 시인의 말을 굳이 빌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한 편의 시 속에서, 그가 얼마나 자연에 귀화(歸化)하여 그것들과 합일되기를 꿈꾸고 있는가 하는 그의 자연 지향적 정신세계의 정점을 엿보게 된다.
내 어릴 적 장독대엔
커다란 항아리가 많았습니다.
어떤 항아리 하나는 그냥 빈 채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 안을 보고 싶은 충동에
닿지 않은 키 늘리려고
깨금발 딛고 서서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곤 하였습니다.
혼자 조용히 들여보다가
휑하니 빈 것을 알고 나선
아하!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 소리 되받아
항아리도 아아 ! 울렸습니다.
지금 텅 빈 그 항아리가 되어
내 속을 드려다 볼 누군가를
지금 것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 '빈 항아리'일부 2006
'삼라만상은 꽉 차 있으면서도 실은 빈 항아리처럼 텅 비어 있다. 그래서 우주는 곧 공(空)이요 태허(太虛)이다. 이 몸 또한 그와 다르지 않으니, 누군가 이러한 '내 안을 들여다보며/ 불러 줄 설렘을 안고' 오늘을 살아간다.
몸이 내가 아니고…… 생각이 내가 아니고…… 내 직책과 내 재산과, 내 명예, 내 감정, 곧 색신(色身)의 내가 아니라, 내 안에서 진정 나를 이끌어 가고 있는 보다 크고 거시적인 나. 그리하여 이 몸뚱어리, 지금의 이 생각과 느낌을 움직이고 있는 나의 참주인을 만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