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정문화재단 이사
유난히도 모졌던 추위를 참고 선생님의 탯자리 무주 삭골에는 홍매가 수줍게 볼을 드러냈습니다. 이런저런 일들이 올 봄에도 오고 간다고 읊으셨는데 당신은 때를 가려 가실줄을 알으셨던가 봅니다. 팔순이 되던 해 미당(未堂) 선생처럼 훌쩍 유학을 떠나고 싶다고 하시더니 구순이 되시어 늦깎이 유학을 떠나셨나이까. 피아노며 거문고와 북, 서예까지 빠지려면 100살은 너머 살아야 할 것 같다고 하시며 예술에 대한 강한 집념을 보이시던 선생님! 이승의 짐이 힘에 겨울만큼 무거우셨나이까.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처럼 하늘에서 들려오는 말씀을 따라 말을 타고 유유히 떠나셨나 봅니다.
덕유산 자락 삭골에서 북악산 기슭 구기동까지 선생님은 굽이굽이 험한 길을 걸어오시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5선의 국회의원으로 국정 구석구석을 살피셨던 일은 선생님의 업적에 백미(白眉)이셨습니다. 교과서를 만들어 전국에 보내셨고 '현대문학'을 만들어 60년 넘게 문인들의 창작정신을 일깨우셨습니다. 전북과 충청에 도시가스를 공급해 에너지 혁명을 이끄셨으며 장학재단을 만들어 만여 명의 인재를 길러내셨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잊을 수 없는 일은 공적이 있어도 대접 받지 못한 전북의 예술인들을 찾아 위로 격려하는 목정문화상 제정이었습니다. 세계적인 대학으로 성장한 전북대학을 대견스러워하시며 회사의 이익을 쪼개 20억원의 거금을 발전기금에 내놓으셨습니다. 90평생 하신 일들을 어찌 다 되돌아 보겠습니까. 당신 스스로도 기억하기가 어려울 만큼 그 많은 업적들을 저희 후학들이 어찌 흉낸들 내겠습니까.
목정(牧汀)의 아호를 받으시고 말을 타며 유유자적 살아가는 낭만적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시던 선생님은 제가 뵈어 온 30년 내내 그런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정 선생님! 전주에 종합예술센터를 만들고 싶어하시던 간절한 꿈이며 20년을 정성으로 가꾸어 오시던 목정문화상은 어찌라시고 떠나셨습니까. 5선 국회의원으로 지역민을 찾아 그 고마움을 전했던 의원님은 영원한 지역구 의원이셨습니다. 그랬기에 수많은 호칭 가운데 '의원님'이라는 호칭을 가장 좋아하셨던가요. 의원님은 가시는 곳마다 보시는 곳마다에 따뜻한 마음, 고마운 마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믿음·소망·사랑 등 삼주덕(三主德)을 실천하여 스스로 행복해지시고자 했던 꿈들은 어떻게 접으시고 홀연히 이승을 하직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임금을 그리던 충성된 신하처럼 저희들에게 당신께서는 자상한 어버이셨고, 어진 임금이셨습니다. 그런 어른이 계시지 않은 세상에서 저희들은 정신적인 고아가 되어버렸습니다. 전주에 내려오시는 날이면 마치도 옛 친구를 만나신 듯 즐거워하시던 선생님, 강진 도요를 찾아, 목포 홍어횟집에서, 심포 백합을 구우며 맛있는 것 하나라도 더 먹이시려 애 쓰시던 의원님! 지난 날의 그런 추억들을 어디 가서 뵙고 더듬어야 합니까. 사람의 일생을 뜨는 구름과 스러지는 구름에 비유했지만 의원님의 일생은 너무나도 값지고 소중했습니다. 교육에 대한 필생의 열정을 고스란히 유물로 남기신 교과서 박물관에서 당신은 영원히 저희들과 작별을 하시게 됩니다. 그곳에서 생의 마침표를 찍고자 하셨던 당신의 염원을 후손들이 받들어 모신 듯하옵니다. 보내드리기가 안타까워 이 못난 글마저 끝마무리를 하기가 두렵습니다.
'청산은 어제런 듯 변함 없는데 / 몇 번이나 석양은 붉게 물들었던고.''삼국지연의' 서사의 한 대목을 애송하시면서 가는 세월을 안타까워 하셨던 목정 김광수 의원님! 저 높은 하늘나라 유학길에서도 이 땅에 남겨둔 저희들을 기억하시리라 믿고 또 믿습니다. 의원님! 부디 영생을 누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