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정양(鄭洋)편 - 고독한 까마귀의 선회

▲ 정양 시인
김제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과와 원광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수료하고 (1977) 전주 신흥고를 거쳐 2007년 우석대 국문과에서 정년퇴직함.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천정을 보며'가 당선되었고, 1977년 윤동주의 시에 관한 글 '童心의 神話'를 정교영이라는 가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 문학평론부문에 이어 당선되었다.

 

참새떼가 요란스럽게 지저귀고 있었다

 

아이들이 모여들고

 

감꽃들이

 

새소리처럼 깔려 있었다

 

아이들의 손가락질 사이로

 

숨죽이는 환성들이 부딪치고

 

감나무 가지 끝에서 구렁이가

 

햇빛을 감고 있었다

 

아이들의 팔매질이 날고

 

새소리가 감꽃처럼

 

털리고 있었다

 

햇빛이 치잉칭 풀리고 있었다

 

햇살 같은 환성들이

 

비늘마다 부서지고 있었다

 

아아, 그때 나는 두근거리며

 

팔매질당하는 한 마리

 

구렁이가 되고 싶었던가.

 

꿈자리마다 사나운

 

몰매 내리던 내 청춘을

 

몰매 속 몰매 속 눈감은 틈을

 

구렁이가 사라지고 있었다

 

햇살이, 빛나는 머언

 

실개울이 함성들이

 

감꽃처럼 털리고 있었다.

 

햇빛이 익은 흙담을 끼고

 

구렁이가 사라지고 있었다

 

가뭄 타는 보리밭 둔덕길을 허물며

 

팔매질하며 아이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감나무 푸른 잎새 사이로

 

두근거리며 감꽃들이 피어 있었다.

 

- '내 살던 뒤안에',전문, 1980년

 

정양은 어린 시절부터 상처 받은 영혼이었다. 그것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좌우익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부친이 정치적 사상범으로 몰려 실종되었고, 그로인해 이후 그 일가(一家)에 주홍글씨처럼 내린 가혹한 형벌은, '몰매 속에서 구렁이처럼 눈을 감고 / - 가뭄이 타는 보리밭 둔덕길을 허물며' 어디론가 사라져야만 했던 어린 시절 시인의 개인사가 시의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년 시절의 고향, 그것은 그에게 핍박과 불신만을 안겨준 가해의 대상었다. 그러나 외면할 수도 없는 그것은 '내 기억 목숨의 기슭에/ 불을 지르는'('난로 앞에서') 트라우마가 되어 이후 그의 시에 짙은 음영을 드리우게 된다.

 

형무소에 끌려가서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육이오를 맞았고

 

구사일생 목숨을 건져냈다는

 

그럴듯한 풍문도 아랑곳없이

 

인공 난리 다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습니다.

 

- 휴전선이 생기던 해부터 어머니는

 

아버지 제사를 지내오다가

 

몸져눕기 한 해 전에

 

팔아먹다 남은 산자락에

 

빈 무덤 하나 지었습니다.

 

- '빈 무덤'중에서, 1997년

 

'보고 싶어도 / 소용없는 사람', 그리고 '내려도 내려도 다 녹아내리는 / 저 첫눈' 처럼 '평생을 갚아도 모자랄 / 폭폭한 빛더미'가 되어, 그래서 그의 고향은 이희중의 말마따나 '못 떠나는 혼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우리 민족사의 恨, 아니 개인사의 한이 되어 고스란히 아직 숙제로 남아 있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겨울과 고향'은 대부분 찬비가 되어 내리거나 눈보라가 친다. 그것은 그리움의 눈, 쓸쓸함의 눈이다. 그리고 눈 그친 그 하늘에는 항용 까마귀 떼가 날고 있다. 그것 또한 외롭고 을씨년스럽고, 또 일찍이 저 세상으로 가거나 행방조차 알 수 없는 그리운 이들의 영혼이 아닐까 한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