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장

박영님

▲ * 수필가 박영님씨는 2005년 '문예연구' 신인문학상(수필 부문)으로 등단. 2008년 한국농촌문학 작품상을 수상했다.
긴 의자와 유리벽, 지붕과 바람막이가 된 텅 빈 정거장에 잠시 앉았다. 사람들이 한두 명씩 모이기 시작했다. 언제 왔는지 조용히 한쪽에 서 있는 여인, 가쁜 숨을 몰아쉬고 달려와 발을 동당거리며 버스가 올 방향을 자꾸만 바라보며 사람들이 두서없이 서 있다. 먼 길 떠나려는 듯 큰 가방에 차림새가 심상치 않은 40대 여인의 진한 화장품 냄새 사이로 누구를 기다리는 듯 승강장 끝자락에 서 있는 한 남자의 모습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 남자는 불어오는 바람에 브라운 바바리코트 앞자락이 펄럭여도 의식하지 않고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이마가 살짝 보이는 단정한 머리와 적당한 체구의 중년 남자는 바바리코트가 잘 어울렸다. 저 남자는 어디에 가려는 걸까.

 

문득 먼 길 떠나신 H작가님이 떠올랐다. 바바리코트가 잘 어울리는 분이셨다. 유난히 배가 불룩한 작가님에게 농담처럼 언제 해산하실 거냐고 하면 아주 여유 있게 "달이 차고 때가 되면 나오겠지."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주셨던 분이다. 바바리를 입을 때면 그렇게 커다란 배도 숨겨버리고 나타나신 선생님, 언제나 다정하게 웃어주시던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아려왔다.

 

7년 전쯤 저물어가는 가을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전주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를 지목하며 잠시 와줄 수 있느냐고 했다. 주머니에 버스비가 없는 걸까 생각하면서 곧바로 출발했다. 선생님은 청곤색 바바리에 베이지색 체크무늬 머플러까지 멋스럽게 차려입고 그곳에 계셨다. 은빛 머리카락이 오후 햇빛에 반짝이며 바바리 앞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도 괘념치 않고 내가 나타날 곳을 향해 서 있었다.

 

자동차 시동을 끄고 잠시 쉬어가자며 저만치에 서 있는 정거장 표지판을 가리켰다. 콘크리트 벽에 지붕이 뾰족한 정거장에 있는 나무로 된 긴 의자 위에 손수건을 펼치시며 앉아보라 하셨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와 편안함에 깊은 숨을 내쉬며 눈앞에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가을걷이를 마친 들녘은 무척 쓸쓸해 보였다. 텅 빈 들판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불현듯 김제평야 황금들판이 떠올랐다. 기억 저편에 놓고 살아왔던 시간들의 아쉬움과 또 다른 연민으로 한쪽 가슴이 아파서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었다.

 

"이제 일어날까요?"

 

"그래도 되겠어?"

 

아무런 말없이 들판을 바라보는 나를 향해

 

"왜 오라고 했는지 알았지?"

 

"네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정거장은 삶의 연속이지만 삶의 쉼터이기도 하다는 것을 항상 바쁘다는 내 삶을 잠시 쉬어가며 뒤돌아보라는 작가님의 깊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시간은 멈출 수 없다. 다만 의식하지 않고 순간순간 잊고 지나갈 뿐이다. 어느새 집으로 가는 버스가 13분 후에 도착한다는 안내 문구가 정거장 전자시스템 창에 떠올랐다.

 

정거장!

 

H작가님이 계신 그곳에도 정거장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