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극은 이제부터. 급발진 사고를 운전자 과실로 돌리려는 자동차를 판 선배와 회사 본부장,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는 가족을 바라보면서 김상식은 억울하고 화만 난다. 그러나 주인공의 대사처럼 "절망의 끝에서 나를 부정한다는 것은 죽을 힘을 다해 살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의 표현"인 내면을 묘사하는 대신 대리운전 기사, 생활고 비관 후 자살, 힘 있는 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경찰·언론 등 그를 둘러싼 사회적 부조리만 나열해 아쉬움으로 남았다.
가장 안타까운 대목은 주인공 김상식의 페이소스(Pathos·고통)를 드러내기 위해 탈을 접목시키는 과정에서 그가 대학 시절 배웠던 탈춤 이야기가 끼어드는 설정이었다. 탈이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 끝내 복 받지 못하는 사회를 보여주기 위한 해학적 도구이자 얼기설기 꼬여 있는 등장 인물의 관계를 풀어주기 위한 장치가 아닌 관념적 유희로 설정된 것으로만 읽혔다.
조명과 소품을 적절히 활용한 연출력과 배우들의 능청스런 연기로 관객들의 몰입도는 좋았으나 사회적 문제와 주인공의 사연이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이 아쉬웠다. 차라리 자취도 없이 사라질 인간이 욕망의 덫에 얽매인 현실을 그렸다면 잔인함을 증폭시키는 삶의 현실에 모골이 송연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극작가 없이는 지역 연극이 발전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중견 극작가의 창작극이 계속해서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는 게 전북 연극이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증거라고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겠다. 하지만 작품명으로 제시된 '탈'이 이중적 현대사회 혹은 현대인이 아닌 '쌩얼'로 살고 싶은 이들의 우울로 다가가기엔 또 다른 연금술이 필요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