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지금을 보내는 청춘들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떨어진 벚꽃 잎 마냥 다음해 봄을 기다린다는 마음처럼 흘러 보내버린다. 나는 이런 이유를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청년 실업률이 높아지고 상대의 마음보다는 서로가 가지고 있는 조건을 더 높이 바라보는 세상이 만들어졌을 때부터라고 말하고 싶다. 이제는 각자가 보여줄 수 있는 '조건들이 사랑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시대'라는 말이 될 수 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조건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서로 같을 때 더 빛난 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무런 계산 없이 마음이 움직이는 데로 행동했던 지난 시간들이 그리운 누군가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아직 충분히 계산 없는, 진짜 마음이 가는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아직 '청춘'이라는 단어에 묶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한 해 청춘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은 '아프니까 청춘이다.(저. 김 난도)'에는 청춘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표현했다. 청춘이란 '불확실성 속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시기'라고 말이다. 그렇다 청춘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그래서 더 힘들고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은 사랑이라는 단어에 적용하고 싶다. 우리들은 청춘이기 때문에 모든 불확실성 속에서 미래를 준비해야하며 사랑 또한 이와 같다고 말이다. 내 앞에 서있는 그 누군가는 나와 같은 청춘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청춘에게 현재는 확신할 수 없는 미래의 조건들을 따지려 한다면 그것은 반칙이라고 말하고 싶다. 축구경기에서 반칙을 사용하면 경고를 주며, 반칙이 두 번 이상일 때는 퇴장을 당한다. 축구경기 뿐 아니라 모든 경기에는 규칙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사랑에도 규칙이 존재한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반칙에 언젠가는 퇴장을 당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 퇴장이 상대에게서 나온 것일 수 있고 혹은 스스로 주는 것일 가능성도 있다. 결국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는 척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청춘들이다. 완벽해진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완벽함을 만들어 가는 순간들인 것이다. 그 중 한 가지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삶을 살아가는데 균형이 중요하듯, 청춘이 단단해지고 강해지기 위해서는 한 가지라도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떨어지는 벚꽃 잎을 그냥 보내지 말고 지금 사랑하고 싶은 누군가와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고 있다면 좋겠다. 벚꽃은 매해 볼 수 있지만, 때마다 공기와 날씨가 다르고, 꽃잎의 모양도 다를 것이며 꽃잎이 떨어지는 순간순간이 다르다. 지나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더 많기 때문에 나중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청춘이기에 아름다운 사랑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