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세한송백'을 논하면서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추사는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일련의 사건에 연루되어 9년간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또다시 2년간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분이다. 제주도 유배 생활 5년이 되던 1844년, 추사는 제자인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 주었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이 그림에는 집 한 채와 소나무, 잣나무 몇 그루가 서 있다. 겨울 제주도의 황량함과 추사의 외로움이 그림 곳곳에서 스며 나온다.세한도에는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을 알려 주는 장문의 발문이 남아 있다.
내용인 즉 이렇다. 이상적이 북경에서 구한 귀한 책을 제주도로 보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고, 변하지 않는 그의 마음을 세한송백에 비유했다.
아마 금방 끝날 것으로 예상했던 유배 생활이 장기화되면서 좋은 시절 같이 어울렸던 사람들은 다 그의 곁을 떠났지만, 이상적만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하고 있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추사는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발문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권력으로 친해진 사람은 권력이 다하면 떨어져 나가는데, 이상적 만큼은 그렇지 않아 세한도를 그려 준 것이다.
아울러 '논어'에서는 세한송백을 세한 이전의 송백과 세한 이후의 송백으로 구분한다. 추사가 발문에서 말했듯이, 진짜 송백은 세한 이후의 송백이다. 추운 겨울이 지나봐야 송백의 진가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 역사서 사기에도 이런 기록이 있다. 중국 전한시대 무제 때 정당시라는 인물은 자기를 찾아온 손님을 문 밖에서 기다리게 하는 법이 없었고, 권력을 행사하는 것도 공명정대함과 청렴함을 지켰던 관리였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주위의 견제도 많아 면직과 재등용, 좌천을 거듭하는 바람에 현직에 있을 때는 문전성시를 이루다가도 그 직을 물러나면 발길이 끊어지곤 했다는 것이다. 당시 사마천은 이를 두고 "정당시 같은 현자도 권세가 있으면 빈객이 열 배로 불어나지만, 권세를 잃으면 금방 떨어져 나가는데, 하물며 보통 사람의 경우는 더할 나위 있겠는가"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지는 바람에 문 밖에 새그물을 쳐 놓은 것 같다며 하루아침에 변하는 세상인심을 그는 꼬집었다.
이한수 시장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맴돈다. 소탈하고 친화적인 성격탓도 있겠지만 권력의 속성상 어쩔수 없는 상황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가 한번쯤은 세한 이후의 송백에 대해 깊게 생각해 봤으면 한다.
그저 그 모습이 바뀌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변하지 않는 줏대, 즉 가치관을 확실히 갖고 있는 사람들을 가려 내 신뢰의 인간관계를 맺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혹한의 겨울일수록, 기회주의가 횡행하는 세상일수록 송백의 지조와 의리는 더욱 빛을 발하는 법 임을 마음속 깊게 새겨주길 꼭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