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지도자였던 아내의 증조부 얘기 소설화 계획

녹두장군 향한 이병천씨의 오랜 애정

팔순의 노모가 밤이고 낮이고 술항아리를 들여다보도록 만든 이병천 씨. 알고 보니 녹두장군을 향한 이 전라도 사내의 각별한 애정은 한해 두해 묵은 것이 아니다. 그는 1994년 이미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소설 2권을 집필했다.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가 그것이다. 조선검의 자존을 지켜가는 검객, 은명기의 삶을 통해 조선검과 검술의 운명이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공간 속에 녹아든다.

 

" 소설가로서 이른바 역사적인 사건들이 그 사건 안에서 어떻게 마무리되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이 많아요. 한바탕 크게 회오리 친 역사적 사건, 큰 광풍 불 듯이 휘몰아친 어떤 사건의 뒷이야기 말이죠. 인간의 삶은 영화처럼 상영시간이 끝난다고 해서 그 뒤로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그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자료들을 무던히도 찾아다니고 발품을 판다. 그러나 소설은 때로 역사서에 나온 한두 줄에서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짧은 한 문장에서 대하소설의 물꼬가 트이는 것이다. 이 소설의 시작도 그러했다.

 

"전라도의 접주들이 체포되자 동학의 남은 세력들이 충청도의 동학교도인 북접의 접주 최시형을 찾아갑니다. 최시형은 그들에게 '너희들의 접주를 구하려고 한 번이라도 노력해 본 적이 있느냐.'라고 묻는 대목이 나오는데 무언가 제 가슴을 쳤어요. 정말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과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거죠. 그래서 김개남을 구출하라는 특명을 받은 은명기라는 인물을 등장시키게 된 거고요."

 

집필을 시작할 때만 해도 9권 분량의 대하소설을 구상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에게는 소설을 완결 짓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늘 따라다녔다. 그래서일까. 이번 '녹두장군 한양 압송 차' 공연을 준비하면서 소설 쓰는 일만큼이나 신명이 나서 했다고 한다.

 

△ 시가 흐르는 냇가에서 태어나다

 

1991년 첫 소설집 '사냥'을 출간한 이후, 2011년 12월 '90000리'까지 모두 10여 권의 소설집을 낸 이병천 씨. 2년에 한 권꼴로 소설을 출간한 그는 대학 1학년이던 198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우리의 숲에 놓인 몇 개의 덫에 대한 확인'이 당선되어 먼저 시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더듬이의 혼'이 당선됐다. 3학년, 4학년이 되면 신춘문예 희곡과 문학평론 부문에 차례로 도전하려고 계획을 세워 준비한 적도 있었지만 시를 쓰다 보니 이상한 욕심이 생겨났다고 한다. 짧은 시로 언제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할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설 당선 이후 '짧은' 시를 접고 '긴' 소설 창작에만 매진해 해왔다.

 

어쩐지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도 유난하다. 시천(詩川)이란다. '시천'이라는 이름은 마을 서당에 다니는 학동들이 냇가에 앉아 붓을 씻어 먹물이 흐르곤 했다는 전설에 따라 지어졌다고 하는데 출생 직후 전주 모래내로 이주해서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까지 그곳에 살았다.

 

"1962년 무렵 부모를 따라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완주 용봉초등학교에 입학해 그곳에서 졸업했죠. 이후엔 전주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전주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문학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과 '글내'라는 이름의 동인을 결성해서 활동했는데 '글내'는 고향 '시천(詩川)'에서 따 온 거죠. 저희 어머니가 녹두장군 공연을 위해 담그시는 술도 바로 이 '시천(詩川)'에서 빚은 녹두꽃술이고요."

 

30년 넘게 소설가로 살았고 그동안 많은 소설을 써왔지만 그는 쓰고 싶은 이야기는 아직 많다. 그러나 얼마 간은 미뤄두기로 했다. 서른 살부터 라디오 PD로 일해 온 그는 내년이면 정년 퇴직을 맞는다. 그토록 원하던 전업 작가가 되면 쏟아 부으려고 힘을 아껴두고 있다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소설로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이번에도 동학이 주춧돌이다.

 

"아내가 언양 김씨의 자손인데 처가 쪽에 동학혁명에 몸 담았던 분이 계십니다. 동학혁명 당시 사발통문에도 이름이 등장하는 대포대장 김응칠(金應七)접주가 장인 어른의 할아버지이시죠. 대단히 의협심이 넘치는 분이셨다고 해요. 전라감영에 붙잡혀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잠깐 풀려나게 돼요. 집안에서 논밭을 팔아서 어떻게든 피신 시키려고 했는데 혼자만 살 수 없다고 태연하게 다시 들어가서 거기서 사형 당하셨답니다. 이 얘기만큼은 꼭 한번 써보고 싶어요."

 

△ 겸업 작가에서 전업 작가로 돌아가는 집, 귀거래사

 

지금껏 10여권의 소설을 집필했지만 변변한 집필실이 없었던 이병천 씨. 그동안 주로 절방을 얻어서 글을 쓰거나 한옥마을 빈방을 구해서 들어가 집필을 해왔다. 그의 아내가 갸륵하게도 글방을 만들어주겠노라고 했을 때 내심 기뻤다고 한다. 오목대 아래 한옥을 짓고 작업실에는 '귀거래사'라는 이름도 붙였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빌려와 말씀 사(辭)자를 집 사(舍)자로 바꾸어 '귀거래사(歸去來舍)'로 정한 것. '여태껏 직장 생활하면서 겸업 소설가로 살다가 이제는 작업실도 생겼으니 나도 장차 전업 집필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도연명의 시에서처럼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서 소설을 쓰다가 새벽빛 희미해지면 '뜰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웃음 짓는 '날이 올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