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대학 캠퍼스는 다양한 축제속에 펼쳐진 젊음의 열정과 환호로 물들여졌다. 대학생활에 있어 빠질 수 없는 활력소인 축제는 학업에 지치고, 인간관계에 지치고, 아르바이트에 지친 대학생들에게 허락된 놀이의 장(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원광대, 전주대, 전북대 등 전북지역 대학에서도 축제가 진행됐다. 5월의 캠퍼스는 그야말로 축제의 달이었다. 뜨거운 열정을 뽐낼 수 있는 허락된 기회를 얻은 대학생들은 과연 어떻게 축제를 즐겼을까.
△연예인 없는 축제는 없다
캠퍼스 내에 대학축제 일정을 알리는 현수막 등이 내걸리고 축제가 스멀스멀 다가오기 시작할 때면 가장 먼저 '이번 축제엔 연예인 누구와?'를 묻는 말로 대화가 시작된다. 전북대 김다정씨(철학과 3)는 "대학생활 동안 축제 때면 항상 가수가 오곤 했기 때문에 이번 축제 때도 당연히 비슷한 형태일 것이라 짐작했었다"고 말한다.
같은 대학교 고현우씨(정치외교 2)도 "대학 축제가 매년 똑같은 형태인데, 바뀌는 건 축제 때 오는 연예인뿐이다 보니 연예인이 누군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을 전했다.
2000년대 무렵부터 시작된 대중가수 초청은 '평화와 열정, 어울림, 청춘의 대동한마당'이라는 주제 아래 학생들의 스트레스를 풀게 만들 열정적인 축제로 준비됐다. 특히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함으로써 문화적인 모습을 갖춰왔다.
그러나 이 같은 모습이 최근까지 유지되면서 각 대학의 축제가 일정한 모습을 갖춘 형식적인 축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의견도 많다. 전북대 경영학과 4학년 김모씨는 "정작 주인이 되어야할 대학축제에 특정 가수를 초대함으로써 가수의 무대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의견을 밝혔다.
△대동제의 의미 퇴색
대학축제는 '대동제'라는 이름을 붙인 축제 이름이 많다. 전북대도 대학축제를 '전북대 대동제'로 불렀고, 그렇게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대동제란 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함께 하나로 어울리자는 의미이다. 2000년대부터 '전북대 대동제'는 학생들이 원하는 대중가수들을 초청하기도 하고, 각국의 음식과 노래 등을 교류할 수 있는 세계문화부스 등을 마련했다. 또한 여성인권신장을 다룬 이색행사, 댄스경연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됐고 학생들만의 매력 표출에 학생들이 앞장섰다.
그러나 대중가수의 초청공연으로 축제를 이어나가면서 다수의 학생들이 참여하며 즐기기보다 소수의 학생들이 학교 축제를 이끌어 가는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다. 또한 구성원·지역민들이 참여해 정이 넘치던 축제에서 기업들의 프로모션 행사 진행 등으로 지나치게 상업적인 축제의 모습을 띠면서 일각에서는 대동제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들린다.
△주막은 대학 축제의 꽃
특히 축제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주막'이 아닐 수 없다. 인기 가수 초청공연이 열리는 대운동장 근처에는 동아리, 과학생회 등이 설치한 부스에 술판이 한창이다. 주막은 어쩌면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대학 축제의 꽃이라 할 수 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진 대학축제에도 주막만은 여전히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허나 매년 축제 때마다 발생하는 사건 사고의 현장역시 주막이라는 점은 씁쓸하다.
보건복지부의 교내 음주법을 놓고 '지나친 대학의 자율성 침해'라는 항변이 무색할 만큼 대학 축제에서 주막은 사건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는 공간이다. 이뿐이 아니다. 과한 음주 탓에 캠퍼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쓰레기들과 각종 오물들은 캠퍼스를 더럽힌다. 대학 축제에 있어 술 없는 축제를 상상도 하기 싫겠지만, 지나친 음주를 자제하면서 대학 축제의 주체가 되어 낭만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 과거의 대학축제는
대학에서 처음 축제가 열린 것은 일제시대부터다. 그러다가 1950~6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학축제가 미국의 영향으로 개교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열리게 됐다.
1950년대 당시 대학 축제는 지성과 낭만의 장이라는 축제의 성격보다 지역 고교생들에게 학교의 존재를 인식시키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1960년대의 축제는 체육대회를 통한 단과대학별 축제가 진행됐다. 1963년에는 계엄령 선포로 개교기념 행사 도중 조기방학에 들어가면서 대학축제의 암흑기를 맞기도 했다.
'남녀칠세부동석'과 같은 유교의 뿌리가 남아있던 당시의 분위기에, 남학생과 여학생이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교제할 수 있었던 시기가 축제 기간이었다.
실제로 이들은 남자와 여자가 모여서 추는 사교댄스와 비슷한 '쌍쌍파티'를 통해 연애를 하기도 했고, 결혼에 골인한 커플들도 있었다. 당시에는 여학생이 무척 귀했기 때문에 남학생들이 '쌍쌍파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인근 대학의 여학생들을 데려와야하는 수고도 필요했다.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로 이어지는 대학 축제는 독재정권 하에 대학생들이 평소 자유롭게 표출 할 수 없었던 사회적·정치적 불만을 내뱉는 장이었다. 10·26과 12·12사태 등이 말해주듯 당시 대학생들의 의식 속에는 축제라는 단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민주·자유를 염원하는 공동체적 성격보다는 먹으면서 즐기는 식의 축제만 열릴 수 있었다. 연극제, 단과대별 각종 경연대회, 게임처럼 요즘 축제에서도 볼 수 있는 행사를 열었고, 가장행렬, 쌍쌍파티, 포크댄스 등이 선보였다. 오락성에 치우치는 축제 문화에 대한 반성이 고개를 들기도 하는 시기였다.
전두환 정권의 말기인 1980년대 중반부터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민주화에 대한 염원과 바람이 축제에 투영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더이상 군사 독재정권이 존재하지 않은 현실에서 대학생들의 관심은 통일로 옮겨지게 됐다.
1980년대의 축제는 당시 동아리들이 주도해나갔고, 3∼4일 동안 진행되면서 80∼90여 개의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졌다.
이민주 (전북대 신방과 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