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주 완산초 - 日 침탈 가속 우려 민족교육 목적으로 개교

 

역사와 전통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그 명맥을 이어오기 위한 노력은 물론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기 위한 끊임없는 변화는 필수다. 학교는 이 같은 역사와 전통을 엿보기 쉬운 곳이다. '백년지대계(백년을 내다보는 큰 계획)'인 교육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기 때문.

 

이에 본보는 매주 한 차례에 걸쳐 개교 100년이 넘은 도내 초·중·고등학교 모두 33곳의 역사, 학교를 빛낸 인물, 도약을 위한 노력 등을 짚어본다. 그 첫 순서로 올해 2월 100회 졸업생을 배출한 전주 완산초등학교(교장 권용진)를 소개한다.

 

△학교가 걸어온 길

 

전주지역의 유지였던 진사 유예근 선생은 일본제국주의 침탈이 가속화되는 것을 염려해 순수 민족의 정수 교육을 목적으로 1906년 12월 15일, 당시 전주읍 서정(현 서학동) 192-9번지에 사립함육학교(4년제 보통과)를 설립했다. 함육학교는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이 막을 내린 이듬해인 1911년 인근 3개 사립학교과 톰합해 전주사립육영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꿨다가 1913년 전주 제2공립보통학교로 편입됐다. 이후 1939년 현재의 완산동 167번지로 이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완산동에 자리를 잡은 이후에는 일본인이 이 학교에 입학하거나 전학 올 경우 죽음을 맞이하거나 집안이 망하는 경우가 생기면서 조선 사람들만의 학교로 남았다. 간혹 일본학생들이 있다가도 조선학생들 등쌀에 오래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 어린 학생들이지만 조국을 강탈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그만큼 컸다는 반증이다.

 

1945년 해방 이후 학령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학교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50년대 전교생이 4000~5000명에 달하면서 교실이 부족해 운동장에서 천막을 치고 수업을 하는 것은 물론 그나마 교실에 들어가도 학생들은 따닥따닥 붙어 앉아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전주에 불기 시작한 신시가지 개발로 인근 지역이 구도심화되면서 입학생이 꾸준히 줄어 현재는 전교생 104명 뿐이다. 또한 전교생의 30%가량이 결손가정, 한부모가정 등 저소득층 무상급식 대상일 정도로 학생들의 가정환경도 좋지 않다. 이런 상황에도 학교의 역사는 유지돼 올해 2월 100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때까지 완산초를 거쳐간 학생은 모두 2만9013명이다.

 

△학교를 빛낸 인물

 

민족 전통문화의 유지·계승을 목표로 설립된 완산초는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특히 동문들은 재계와 언론계에 두루 포진했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에서 해방 이후 반탁운동의 대표격으로 불리는 소석 이철승 선생(서울평화상 문화재단 이사장)은 호남을 기반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탄탄히 다진 인물로 꼽힌다. 그는 전 신민당 대표로서 김영삼·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을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로 둔 한국 현재 정치의 주역 중 하나이다. 그는 학창시절 일제의 창씨개명은 물론 일본어 배우기를 끝까지 거부하며 민족의식을 지켰다고 전한다.

 

△도약을 위한 노력

 

구도심에 위치한 완산초는 현재 전교생이 104명 뿐이다. 전주지역에서 손에 꼽을 만한 '초미니' 학교인 것. 이에 학교와 지역사회는 학교살리기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로 시민단체와 인근 초등학교 동문들로 구성된 원도심교육공동체와 전주교육지원청의 지원을 받아 아름다운 학교 가꾸기 사업 등 다양한 학교살리기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권용진 완산초 교장은 몇 년전부터 학생들에게 꽃씨를 나눠주고 이를 교정에 심도록 했다. 이 꽃씨는 지역주민에게도 전해졌다.

 

권용진 교장은 "지역사회에서 사랑 받는 학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