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역사와 함께 한 63년

대쪽같은 꼿꼿함으로 격랑 헤치며 정론직필(正論直筆)

● 선배들이 말하는 전북일보

 

전북일보는 1950년대 한국전쟁의 포연 속에서 창간됐다. 참혹한 전쟁의 현장, 생명을 위협받는 공포 속에서 전북일보는 전란의 현장을 지켰던 역사의 증인이 됐다. 전란의 소용돌이와 산업화·민주화로 이어진 현대사의 격량 한복판에서 정론직필 사명을 위해 뛰었던 선배 기자들을 통해 전북일보의 역사를 만났다. 그 역사는 곧 전라북도의 근현대사며, 전북인들의 그 시대 생생한 삶이기도 했다.

 

▲ 문치상 前 전북일보 논설위원

"전화 없던 시절, 시간과 끊임없는 사투"

 

'마의 고개'라 불리던 완주 곰티재에 새로운 터널이 뚫리면서 옛 곰티재 주막이 사라졌다. 세 칸 짜리 단출한 초가로 지어진 주막은 오가는 차와 승객의 휴게소이자 새벽차를 기다리는 시민들의 여관이었다.

 

곰티재 주막집 주인이 머리에 뗄감을 이고 마지막 버스를 떠나보내는 기사를 썼던 문치상 前 전북일보 논설위원(72)은 1966년 진안 곰티재 대형 교통사고를 생생하게 취재한 기자이기도 했다. "전화가 없었던 시절, 현장에서 돌아와서 기사를 쓸 때면 시간과의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는 "사고 현장과 곰티재 도로의 위험성을 전달하는 기사를 통해 모래재 도로 개설이 이뤄졌다. 하루에 두 번만 오간 버스로 주민들은 불편을 많이 겪었으나 도로가 개통되면서 교통량은 더 크게 늘었다"고 기억했다.

 

▲ 김종량 前 전북일보 편집국장

"전북 언론 종갓집…반론권 충분히 줘야"

 

1980년대엔 군부 정권 시절 '비위에 거슬린다고 숙청을 당했던' 기자들이 꽤 많았다. 김종량 前 전북일보 편집국장(71·언론중재위원회 부위원장)도 언론의 수난사를 거친 세대. 전두환·노태우 정권 과도기에 조선·중앙·동아일보 지역 주재 기자들은 해직과 복직을 넘나들었고, 1987년까지 유지됐던 '1도1사 '가 무너지면서 지역신문사들은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졌다.

 

돈이 안된다는 신문사가 계속해서 생겨나는, 경제학자도 설명하지 못하는 아이러니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본에 더 충실해야 길이 생긴다"고 했다.

 

"63년 역사에 걸맞는 종갓집 언론의 역할"은 차별화된 의제 설정. 그는 "현장에 가볼 것, 반론권을 충분히 줄 것"을 강조하는 기자정신을 강조했다.

 

▲ 정지영 前 전북일보 편집위원

"현재의 기록이 곧 역사…현장 충실해야"

 

정지영 前 전북일보 편집위원(71)은 지치지 않는 열정을 자랑한다. 그는 전북일보 창간 60주년 사진전 '기억'을 위해 흑백필름 속 역사를 복원하는 '전북의 타임캡슐'을 꺼내는 작업에 동참했다.

 

당시 군부 독재 시절 신문사 사진은 안기부 검열을 받아 누락되는 일이 많았다. 그는 "전두환 정권 시대 최초 소고기 수입을 했을 때 격렬한 반대운동을 담은 '우공의 시위'는 25년 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기획으로 실리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우공의 시위'는 도내 언론 최초로 1985년 제20회 보도사진전에서 동상을 차지한 작품. 흩어져 있던 사진이 한 권의 책이 되고 역사가 되었듯 후배들에게 "현장에 충실해달라"는 그의 당부는 지금 현재의 기록이 역사가 된다는, 단순한 의미 이상의 무서운 교훈이다.

 

▲ 박대홍 前 전북일보 제작국장

"인쇄 끝날 때까지 조마조마 긴장 연속"

 

전북 일간지중 유일하게 남아 있던 전북일보 윤전기(신문 인쇄기)가 2년 전 사라졌다. 때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말썽을 부려 윤전부·제작부를 비상 대기시켰던 기계도 느즈막하게 은퇴했던 것. 2년 전 퇴직한 박대홍 前 전북일보 제작국장(63)은 윤전기와 울고 웃은 산증인이다.

 

1980년부터 2011년까지 전산부·재판부·윤전부를 총괄했던 그는 "1988년부터 석간신문에서 조간신문으로 바뀌면서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 밤 12시를 넘겨 인쇄가 종료돼서야 늘 조마조마하는 심정이었다"고 기억했다.

 

편집국 막내 기자들이 매일 윤전기에서 막 찍어온 신문을 보며 오탈자를 확인하던 기억은 이제 낡은 서랍 안 추억이 됐다.

 

● 전북일보의 '유물들'

55만1880시간이 흘렀다. 1만9279번째 신문이 발행됐다. 63년이라는 세월 속에 많은 것들이 새로 태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묵묵히 전북일보를 지켜온 게 있다. 전북일보와 함께 한 오래된 물품들. 창간기념일을 맞이해 가장 최근의 물건부터 시대별로 정리해봤다.

 

△1983년산 삼성전자 전화기 = 1983년 10월 23일 전북일보 물품구입 대장에는 "신사옥에 설치할 전화기를 다음과 같이 확정 구입하고자 품의합니다"라는 내용과 함께 삼성전자 전화기(모델명 SS-702PG) 20개를 각 2만7500원(vat 포함)에 구입했다고 기록돼있다.

 

'IC 회로를 사용, 거리에 관계없이 음성이 똑똑히 잘 들리며 디자인도 세련되어 통화자에게 새로운 만족을 드립니다. 로타리 다이알 전화기 대용품으로서 다이알링이 신속 간편하며 잘못 접속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라는 거창한 광고처럼 당시에는 최신식 전화기에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구입한 전화기들은 대부분 신형으로 교체됐지만 단 한 대만이 정치부 구대식 차장의 자리에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구대식 차장은 "이렇게 오래된 물건인 줄 몰랐다. 버튼도 잘 눌러지고 통화음도 깨끗하다"며 놀라워했다.

 

한편 1983년 이후 출생한 전북일보 편집국 기자는 경제부 윤나네·교육부 최명국·수습 문민주·인턴 강다현 등 모두 4명이다.

 

△1973년 내·외근 단합체육대회 트로피

1973년 6월 1일 전북일보·전북매일·호남일보 등 3사가 오랜 진통 끝에 통합됐다. 하지만 서로 이질적인 문화와 정체성으로 구성원간의 불신은 수면 아래 여전히 잠재돼 있었다. 구성원의 화합을 이끌어내는 게 가장 절실한 과제였던 전북일보는 그해 10월 20일 내·외근 친목체육대회를 개최했다. 체육대회에 참여했던 김남곤 前 전북일보 사장은 "3사 기자들이 모여 하나의 구성체로 힘을 발휘하기 위해 체육대회가 열렸다. 트로피가 하나인 것은 모두가 공동 우승이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김남곤 前 사장을 마지막으로 현재 전북일보에는 당시 체육대회에 참여했던 사람은 한 명도 남아있지 않다.

 

△1950년 창간호 이전 전북시보 = 1950년 10월 15일 창간호가 최초로 발행된 신문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같은 달 5일부터 발행된 전북시보가 최초로 발행된 신문이다. 안타깝게 1~6호까지는 남아 있지 않고 1950년 10월 11일 발행된 7호부터 같은 달 14일자 10호까지만 전해지고 있다. 전북시보는 당시 6·25 전쟁 상황을 반영하듯 전쟁과 관련된 기사가 대부분이다. 전북시보 7호의 1면 톱기사는 '항복문 수낙치 않으면 유엔결의에 따라 조치'라는 제목으로 맥아더 장군이 북한군에 항복권고문을 살포했다는 기사로 채워졌다.

 

△1942년산 지형지·연판·자동 활자 주조기 = 전북일보 창간과 함께 수십 년간 신문제작의 마지막을 책임졌던 지형지·연판·자동 활판 주조기. 1991년 2월 1일부터 납 활자 종막과 함께 컴퓨터 조판시대가 열리며 CTS시스템으로 신문이 제작되면서 역사의 뒤안으로 물러나야 했다. 납으로 구워 낸 네모난 납 활자를 골라 조판한 뒤 잉크를 묻혀서 종이에 압력을 가해 찍어 내는 활판인쇄를 기억하는 이는 현재 전북일보에서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전국적으로도 파주 출판도시 내 '활판공방'만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든 납 활자 인쇄에 사용된 기기들은 현재 전북일보사 1층 현관에 전시돼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