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부두의 삽화

▲ 김은숙
여객선 터미널로 한 남자가 걸어온다. 그는 광장을 가로 질러 대합실로 들어온다.

 

매표소 앞으로 가서 고개를 젖히고 높이 걸린 시간표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구석으로 와서 털썩 주저앉는다.

 

배가 떠나려면 꽤나 많은 시간이 남은 모양이다.

 

오월인데도 시월이 연상 될 만큼 하늘이 파랗고 높다. 거기에 레이스 같은 구름이 가득 뿌려져 있다.

 

"휴우"하고 남자가 숨을 내쉰다. 먼 길을 왔는지 얼굴은 창백하고 두 눈이 푹 꺼져 있다.

 

수염이 텁수룩하고 무척 초라해 보인다. 노숙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는 하릴없는 사람처럼 벽에 기대어 상상을 한다.

 

아마 그는 밤기차를 타고 왔을 것이라고. 도시로 들어오기 싫어 떠돌던 외로운 방랑자일 것이라고.

 

마치 딴 세상에서 온 사람처럼 넋이 나간 듯한, 그러나 철학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좀 특이한 차림새였으므로.

 

그가 뜻 밖에도 낡은 시집을 꺼내든다. 여기저기 뒤적이다가, 메이스 필드의 〈그리운 바다〉에 손이 멈춘다.

 

공교롭게도 그 시는, 한 때 내가 공책에 적어서 가지고 다니며 외웠던 몇 편 되지 않은 시 중의 하나였으므로 반가운 마음이 들어 곁눈질로 그의 책을 넘겨다본다.

 

-전략-

 

내 다시 바다로 가리

 

그 외로운 바다와 하늘로 가리

 

큼직한 배 한 척과 지향할 별 한 떨기 있으면 그뿐

 

박차고 가는 바퀴 바람의 노래

 

흔들리는 흰 돛대와 물에 어린 회색 안개 동트는 새벽이면 그뿐이니

 

-후략-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나 온 일행들의 애정 어린 핀잔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왜 그리 멍하게 서 있느냐고. 여기까지 와서도 소설을 쓰느냐고. (그녀들에게 모든 글은 소설로 통한다.)

 

젊은 여인이 바람에 날리는 원피스 자락을 누르며 광장을 걸어온다. 과일 행상의 리어카에 수북이 쌓아 놓은 참외의 노란 빛깔이 곱다.

 

밤기차를 타고 왔을 그 남자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다정한 연인들이 그의 곁에 서 있다. 외로워서 살 수 없을 거라며 여인이 울음을 터뜨린다. 그녀의 애인이 머리를 가슴에 끌어안으며 달랜다.

 

수학여행을 떠나는지 갑판에는 고만고만한 여학생들이 몰려 있다. 그들은 벌써 갈매기가 다 되어 있는 듯한 실루엣이다.

 

삼삼오오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바다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뒤로 항구의 배경이 잡히게. 김치. 치즈.

 

환히 웃는 모습으로 서로의 사진 속에 남기 위한 주문도 가지가지일 것이다. 30년 쯤 후에 저들은 사진첩에서 〈열일곱 살, 항구를 떠나며〉라고 제목이 붙은 저 사진을 들여다보겠지.

 

바람이 산들거리고 흰 구름이 떠 있던 어느 봄날을 그리워하면서.

 

뿌우- 뱃고동소리다. 배를 탄 사람들도 부두에 남은 사람들도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든다. 어제까지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오늘은 축제 같은 이별을 하고 있다.

 

적막한 동굴의 깊은 울음 같은 뱃고동 소리를 남겨두고 배는 멀리 사라져 갔다. 파초 잎을 높이 쳐들고 저들을 반길 그 섬에 가는 동안 아마도 저 사람들 모두 새가 될게다.

 

노래 소리도 높이높이 띄워 올릴 게다.

 

시인이기도 한 김은숙씨는 1990년 '현대문학'(수필)과 2003년'지구문학'(시)으로 등단. 수필집'그여자의 이미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