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가면 '죄인'입니까

과거보다 덜한 학생운동 비겁하다 손가락질하는 강요된 진보는 후퇴 야기

▲ 윤재량 전북대신문 편집장
지난해 여름, 청년유니온의 한 관계자가 명사로 초청된 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청년 유니온 관계자답게 오늘날 대학생들의 상황과 통증을 유창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한 청중이 그에게 물었다. "오늘날 청년들은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정치에 문외한인데, 사회에서 청년들이 외면 받는 것은 그들이 자초한 일이 아닌가요?"라고. 그러자 명사는 당장 내일 월세와 등록금, 그리고 취직을 걱정해야 하는 대학생들이 정치에 문외한인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청년들을 변호했다.

 

때때로 몇몇 청년들은 오늘날 대학생들을 7,80년대 대학생들의 모습과 비교하며 '비겁하다' 고 평하곤 한다. 스스로의 주권을 찾아 격렬한 학생운동을 펼치던 당시의 대학생들과 지금의 대학생들의 모습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은 학생운동으로 기득권이 된 지금의 기성세대들이, 이제는 그 사다리를 걷어차고 지금의 청년들에게 경쟁을 요구한다며 기득권을 비판함과 동시에 그러한 요구에 응하는 청년들도 함께 비판한다. 이러한 대학가의 모습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일종의 문화충격 같은 것을 느꼈다. 아마 기성세대들과, 아직 대학생이 되지 않은 어린 학생들은 모를 것이다. 이곳에서는 '투쟁하지 않는 학생들' 이 마치 죄인처럼 취급받는다는 것을.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당시 한 선생님께 들은 말이 있다. 7,80년대 대학가에서는 특별히 정치적인 성향이나 관심이 없더라도 마르크스 평전을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이 하나의 대학 트랜드였고, 그때는 그것이 멋이었다고 말이다.

 

나는 그 선생님을 다시 만난다면, 지금도 그것이 변하지 않았노라고 말하고 싶다. 분위기가 변했고 과거보다 '투쟁' 하는 학생들은 적어졌지만, 도서관과 고시원에 앉아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비겁하고 한심한 죄인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 이 대학사회이다.

 

아니, '투쟁'이나 '운동'까지도 아니다. 이곳은 '진보' 라는 단어에 극도로 민감한 사회이다. 학내의 경사를 소개하는 기사를 쓸 때 마다 학교 홍보기사를 쓴다며 비겁하다 조롱하는 반응을 받을 때 느끼는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분명 기형적인 형태의 진보이다. 대학생의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그들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건전한 사회에는 늘 행동하는 청년들이 존재했고, 변화된 사회 속에서도 자신의 미래를 걸고 용기 있게 투쟁하는 그들은 분명 이 사회에서도 필요한 존재이다.

 

그러나 참여하지 않는 청년들을 비겁하다 매도하는 생각을 고칠 필요가 있다. 1점대 학점으로 졸업만 해도 어디로 취직할지 일자리를 고르던 시대는 끝났다. 오늘날 대학생들의 현실조차 이해하려들지 않으면서 그들을 위해 투쟁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이다.

 

그러고 보면 이 사회는 청년들에 대한 강한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는 듯하다. 청년들과 대학생들은 반드시 투쟁해야 하고 현실보다는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고, 그런 암묵적인 강박관념은 오늘도 조용히 미래를 준비하는 대학생들의 목을 조른다.

 

강요된 진보는 후퇴를 야기한다. 침묵하는 청년들에게 비겁하다 손가락질하기보다는 그들을 지켜봐주고 응원해 주는 편이 낫다. 그러한 응원과 관심이 당신이 생각하는 정답이 아니라면, 그들을 '비난' 할 것이 아니라 '설득'할 일이다.

 

△ 윤 편집장은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으로 6월부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전주지역회의 청년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