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조각가 도병락 씨]삶의 상처 꺼내 '깎고 또 깎아'

수도승 연상케하는 고된 작업과정 반복 / 내면의 울림에 집중 아들 잃은 슬픔 치유

▲ 도병락 作.

미술가가 작업을 이어가는 이유는 각각 다르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때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 등 각자 다양한 모티브를 가지고 작업에 임한다. 이중에서 조각가 도병락씨(54)의 작업방식은 다소 특이하다. 수도승을 연상케 하는 고된 작업으로 지나 온 시간 속에 묻혀 있던 아픈 기억을 치유한다.

 

그의 작업과정은 언뜻 보면 개인의 치유과정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관객은 작품에 녹아 있는 그의 아픔을 보고 동질감을 느낀다.

 

"전주고속버스터미널 맞은편 건물 지하실에서 7년 동안 전화, 시계, 라디오, TV도 없이 지냈어요. 너무나도 힘들고 지루한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감성에만 의지하는 작업의 틀을 깨고 싶었죠."

 

조각과 회화의 경계에서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는 그는 회화 작업으로 화가 인생을 열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적어도 10번 이상 물감을 찍으면서 캔버스 꼭대기부터 밑바닥을 채워나가는 중첩의 연속이었다. 이것은 시간의 중첩이기도 하다. 한 번 찍고 이것이 마르면 두 번 찍고 이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며 시간과 물감이 엉겨 붙어 최후에 만들어 내는 회화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의 회화 작품 제목에 'Through the time(시간을 통해서)'가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다.

 

"미술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작업을 하면서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아들의 죽음, 경제적 문제 등 수많은 과거의 고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죠. 이럴수록 더욱 작업에 몰입하며 고무와 우드락을 깎고 붙이고 쌓는 과정을 반복했어요."

 

그의 회화 작업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조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캔버스의 한 지점을 계속 찍어내는 그의 붓질은 재료의 한 부분을 무수히 깎아내는 조각도의 움직임과 같다.

 

그는 고무와 우드락을 선택했다. 평평한 고무와 우드락 위에 밑그림을 그린 뒤 적절한 깊이와 경사면을 구상해 판다. 그의 조각도와 얇은 절단기는 고무와 우드락 위를 수천 번 지나간다. 같은 지점을 수십 번 왔다 갔다 해야 딱딱한 고무는 유연해지고 쉽게 부서지는 우드락은 견고해진다.

 

고무 작업에서 파내는 행위는 어떤 것을 없애는 것으로 보여 지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과거의 기억을 드러내는 행위에 가깝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라는 노랫말처럼 아픔을 찾아내기 위해 다른 아픔을 끄집어내는 다소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그의 고무 작품을 보면 어떤 곳은 조각도가 간신히 비켜나가 아주 얇은 막같이 아슬아슬한 부분으로 남아 있는가 하면 어떤 부분은 아예 구멍이 나있기도 하다. 수많은 인파가 발자국을 남긴 모래밭 같이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사라진 것들에 대해 집착하고 영향을 받습니다. 내가 만든 퍼즐들은 이런 것들의 집약적인 존재로 표현되고 있죠.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교차하는 수많은 연결고리들 속에서 기억은 존재에 대한 이유를 확인시켜주며, 동시에 참혹한 허무함과 아쉬움을 남깁니다."

고무 작업이 힘든 기억을 모두 끄집어내 유하게 만드는 과정이라면 우드락 작업은 끄집어낸 기억과 생각을 정리해 다시 쌓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Memory Existence' 시리즈는 지름이 서로 다른 원형 고리들을 겹겹이 쌓아서 마치 콜로세움을 위에서 본 듯한 모양을 한 작품이다. 바닥에 놓인 원형의 우드락 위에 지름이 좁은 원형 고리가 놓이고 그 위에 조금 더 넓은 원형 고리들이 쌓여 중심을 향해 깊어져 간다.

 

그는 우드락에 알 수 없는 구조물들을 건설하고 발견하고 파괴해나가면서 자신의 내면에 집중한다.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조각들이 맞춰나가듯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들을 구성해나간다.

 

목원대 미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개인전 11회와 다수의 기획초대전 및 단체전에 참가했고 국·내외(뉴욕, 홍콩, 스위스, 벨기에 등) 아트페어에 참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