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금지령

우리나라 역대 통치자 중 골프에 가장 너그러웠던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일 것이다. 재임 중 한번도 골프에 시비를 걸지 않았다. 한발 더 나아가 "농부도 골프를 치도록 하겠다."고 했다. 돈 있는 사람만 즐길 수 있는 사치 스포츠가 돼선 안된다는 것이다. 이 발언 이후 대중 골프장이 곳곳에 들어섰다. 골프 대중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골프는 공직자 기강의 잣대처럼 돼 버렸다. 1993년 집권한 김영삼 대통령은 당선 직후 "재임 중엔 골프를 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사실상 골프 금지령이었다. 골프를 치다 감사팀에 적발돼 신세를 조진 공직자들이 수두룩하다. 노무현 정부는 노 대통령이 간간이 골프를 즐겼지만 이따금 자제령을 내렸다. 고위 공직자들이 몸을 사릴 수 밖에 없었다. 이해찬 국무총리는 3.1절 기업인들과 골프를 친 사실이 드러나 결국 총리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이명박 정부에선 류우익 대통령실장의 부정적 발언이 골프 금지령으로 확대 해석되자 이동관 대변인이 나서서 "자기가 적절한지 검토해 스스로 판단할 문제."라고 진화했다.

 

박근혜 정부는 어떨까. 이경재 방송통신위원장이 지난달 "이제 골프를 좀 칠 수 있게 해달라."고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박 대통령은 웃기만 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얼마 전 주요 언론사 논설실장들과의 간담회에서도 "지금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골프 금지령이 계속되고 있는 걸 보여준다.

 

최근엔 허태열 대통령 비서실장이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골프에 대해 두어 가지 지침을 내렸다. "휴가 때 꼭 치고 싶은 사람은 문제가 되지 않을 사람과 자비로 쳐도 된다." "웬만하면 필드보다는 스크린골프를 이용하는 게 좋겠다." 조건부 해금인 셈인데 대통령과의 조율 끝에 나온 지침은 아닌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3학년 어린아이들한테 "물가에 가지 마라, 물놀이 하고 싶을 때는 욕조 안에서 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골프를 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까지 대통령한테 물어보는 나라는 우리나라 말고는 없다. 더구나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 문제를 논의할 만큼 대한민국은 한가롭지도 않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골프 가이드라인을 정해 주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꼭 어린아이들 노는 꼴이다.

 

이경재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