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5·16 그리고 10월 유신

이종민 객원논설위원

 

"기금은 전북도, 도 농협, 정읍군에서 각각 1백만 원씩 내놓기로 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당시 국가재건회의 교통체신위원장이었던 박두선(朴 斗先)장군(정읍출신)이 박정희 의장에게 건의하여 1백만 원을 얻어와 총 4백만 원의 기금이 마련됐다. 그 때, 4백만 원이란 돈은 대단히 큰 돈이었다."

 

황토현의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세워질 때 그 기금(성금이 아니라)이 어떻게 마련되었는가에 대한, 당시 중심에 서있었던 이치백 원로언론인의 증언이다.

 

이 회고록에 의하면 이 사업이 처음 제안된 것이 1963년 7월. 도 단위 기관장들도 참여한 한 술자리에서 당시 전북 지사였던 김인(金仁, 현역 육군준장)에게 건의하면서 시작된다. 김지사는 "너무도 시원하게" 동의하고 다음 날 농협도지부장, 정읍군수, 도 공보실장과의 자리까지 주선해 준다.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우선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을 세우기로 이야기를 모으고 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했다."

 

위원장에 가람 이병기선생이 추대되고 기념노래(작사 신석정, 작곡 김성태)까지 마련되는 등 "건립사업은 순조로이 진행되어 마침내 이해 10월 3일, 황토현 현지에서 제막식을 가졌다."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의장이 "임석한" 가운데.

 

1963년이면 비상시국이다. 5.16군사 쿠데타 이후 2년, 아직 민정이양 직전의 가파른 정국! 이런 시국에 동학난으로 불리던 사건을 기념하자는 제안은 거의 목숨을 건 모험이다. 그리고 제안 3개월 만에 그 많은 기금을 모으고 기념노래가 만들어지며 기념탑이 세워진다! 과연 국가(재건회의) 차원의 비상조처가 수반되지 않고도 가능했을까? 동학농민혁명100주년기념사업은 준비모임 하는 데만 2년 이상이 걸렸는데.

 

그리고 10년 후인 1973년, 10월유신 1년 후에 우금치 동학혁명군위령탑이 세워진다. 마찬가지로 건립위원회는 조직되었다. 그 비문에 왈 "님들이 가신지 80년 5,16혁명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농민군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10월유신의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우리 모두가 피어린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 탑을 세우노니…서기 1973년 11월 11일 제자 대통령 박정희…" 그중 '5.16혁명' '10월유신' '대통령 박정희' 부분은 망치질로 지워졌다.

 

역사는 기리는 것 자체가 아니라 누가 어떤 정신으로 기리느냐가 중요하다!

 

이종민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