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 임원취임을 위해 인감증명을 떼러갔다. 신분증을 요구하기에 공무원증을 내밀었더니 안 된단다. 규정에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만 된다고 되어 있단다. 신분증은 본인임을 확인하기 위한 거 아니냐? 이 공무원증에 사진이 붙어있고 생년월일도 명기되어 있다. 이것으로 본인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거 아니냐? 더구나 이것은 부동산 매매 등 금전거래와 관련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규정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그 규정을 왜 만들었냐?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에게 증명서 함부로 발부하지 말라는 취지에서 만든 거 아니냐? 해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동어반복의 '규정타령'뿐!
한국방송통신대학에서 강의 요청이 왔다. 번거롭다는 거 잘 알지만 학생들의 평생학습에 대한 열의를 생각하여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 학기 들어 새삼 재직증명서 제출을 요구한다. 지난 학기에도 강의를 했고 학점까지 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규정이 새로 바뀌었단다. 내 신원을 확인하고 강의 요청을 한 거 아니냐? 해보지만 역시 여기도 '규정타령'!
수경행권(守經行權)이란 말이 있다. 원칙을 지키되 상황에 맞게 대처한다(권도를 행한다)는 뜻이다. 미생지신(尾生之信)과 대비되는 말로, 옛날 미생이란 사람이 다리 밑에서 만나자는 약속(규정)을 큰물이 났는데도 융통성 없이 지키려 하다가 물에 빠져죽은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형수가 물에 빠져 떠내려가고 있는데 남녀유별의 예(규정) 때문에 손 내밀어 구하지 않는 것은 더 큰 예를 놓치는 일이다. 요즘 한창 유행인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좋은 의사'는 어린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병원규정에 대항한다. 규정에 얽매인 '의료기술자'에 맞서 참된 의료인의 길을 추구함으로써 시청자들의 울분을 대신 달래주고 있는 것이다.
규정(원칙)을 지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유념할 점은 그것의 목적, 그 정신과 철학을 함께 새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규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추구하는 가치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의사에게는 환자들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원칙이듯 공무원들이 보다 소중하게 지켜나가야 할 원칙은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 서류가 좀 미비하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민원인들을 돌려세워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공무원이 공무원한테 공무원증 때문에 곤욕을 치러서 그런지 객설이 좀 길다!
이종민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