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한 켤레

▲ 신 영 규
선물 받은 상품권으로 백화점에 들러 구두 한 켤레를 샀다. 콧등이 준수하고 몸통이 거울처럼 깨끗한 유명상표가 붙은 구두다. 그는 기나긴 외출이나 중요한 행사장에 갈 때면 나와 한 몸이 되어 여행을 즐기기도 한다.

 

눈이 오나 비가와도 내 발과 생사를 함께 하던 너는 더러운 흙탕물을 뒤집어쓰고도, 냄새나는 시골 뒷간에 들어갈 때도, 어떤 날은 개자리의 그루터기를 밟고도 불만스런 몸짓 한 번 하지 않고 나의 분신으로 살았지. 미끄러운 도로에서 끝 날을 세워 나를 보호하고 바다 건너 일본까지 기꺼이 동행해주던 너와의 인연을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걸으면서 발이 좀 불편함이 느껴져 문득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두의 발등 쪽 옆구리 접히는 부분이 약간 벌어져 있어 볼썽사나워 보인다. 아마 오래전부터 조금씩 달아 헤어졌나보다. 그래도 그와 정 들고 버리기 아까워서 더 신고 다녔다. 여유가 있어 두 켤레를 사서 번갈아 신었으면 좋았을 텐데, 한 켤레만으로 신다보니 빨리 달은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높은 계단을 오르다 발을 헛디뎌 갑자기 구두의 오른쪽 살점이 툭 떨어져 나가버렸다. 그때 내 발도 심한 통증을 일으켰다. 난 상처 난 몸통을 가만히 비닐봉지에 넣어 병원으로 갔다. 우측 골반 뼈를 수술하여 건강을 회복하니 다시 새 구두가 되어 내 발목을 꼬옥 껴안았다. 그러다 며칠 후 이번에는 좌측 골반 뼈가 빠져나가 또 수술을 받고 퇴원하던 날 의사는 웃으면서 대장과 소장의 연결 부위가 닳아서 몇 달 못가서 하직한다니 그는 회생 불능한 불치병에 걸린 걸까?

 

사람간의 인연의 시작과 끝도 구두가 그 수명을 다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만나고 헤어진 무수한 사람들, 낡아 헤어진 구두를 보면서 인연의 깊이를 생각해 보았다. 내 발을 거쳐 간 구두가 몇 켤레인지, 나와 인연을 시작하고 끝맺었던 사람이 몇 명인지 모르겠다.

 

문득 신발장에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구두를 꺼내 볼 때가 있듯 과거속의 인연도 그렇게 꺼내보고 싶다.

 

이제 두 번의 수술을 통해 신었던 구두의 수명이 거의 다 되었나 싶다. 수년을 나의 발과 일거수일투족을 같이 해온 어느 날 고약스런 빗물이 옆구리를 살며시 파고들었다 수명을 다한 구두를 쓰레기봉투 속에 넣어 장례를 치러주었다 비스듬히 누워 눈물을 주르르 흘린다. 수년을 나의 발과 함께 해온 그의 생애가 오늘 새벽이면 환경미화원의 손에 이끌려 나락(奈落)에서 열락(悅樂)으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당신은 누구냐고 누가 묻는다면 내 갈 길을 안내해준, 희로애락을 함께 한 내 분신이었다고 말하리라. 구두 속에서 내 발은 여름 해같이 불타오르고, 구두 속에서 삶은 언제나 실감나고 즐거웠었다. 구두는 전조등 불빛처럼 욕망을 비추고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외출시켰다. 너는 나의 분신이었다. 내 발과 오래토록 인연을 함께 한 넌 나의 오랜 친구였다. 지상을 더없이 사랑하게 만드는 구두. 지상을 떠날 때 해를 향해 날아갈 구두. 잔인하도록 아름다운 내 희망 한 켤레야!

 

 

* 수필가 신영규씨는 1995년 '문예사조', 1997년 월간'수필과비평'로 등단. 수필집'숲에서 만난 비',칼럼집'돈아 돈 줄게 나와라''펜 끝에 매달린 세상'등이 있다. 전북신문학상, 전북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