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만에 봉황대기 우승 이끈 석수철 군산상고 감독

"역전의 명수 옛 명성 회복…선수들 복지 위해 최선"

▲ 석수철 감독이 지난 2011년 부임해 그동안의 야구부 생활을 이야기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군산본부=오균진
'역전의 명수'가 부활했다. 추석연휴를 사흘 앞둔 지난달 15일 서울 목동구장에서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지난 1999년 황금사자기 우승 이후, 군산상고의 우승 소식은 14년의 세월을 넘어 실로 오랜만에 들려온 낭보였으며 17년만에 다시 품은 봉황기였다. 특히 장단 21안타를 몰아치며 20대4의 대승을 거둔 '제41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 소식에 군산시민들은 역전의 명수 부활을 이야기했다. '역전의 명수' 부활 한가운데에 군산상고 출신으로 성균관대를 거쳐 프로야구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활약했던 석수철(41) 감독이 있었다. 침체에 빠져있던 군산상고 야구부 감독으로 지난 2011년 12월 부임해 1년 반 만에 전국대회 우승을 이끌며 '역전의 명수' 신화를 부활시킨 석수철 감독을 만났다.

 

-이번 대회 우승요인과 최대 고비는.

 

"우승요인으로 결론부터 말한다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훈련이었습니다. 막상 감독으로 와보니 가능성 있는 재목감들도 있었지만, 기본부터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인사에서부터 기합 소리까지 제멋대로였고, 그동안 주위에서 응석을 받아준 탓인지 패기도 근성도 없어 보였습니다. 야구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경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배들이 이룩해 놓은 역전의 명수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와 군산상고 야구 선수로 지녀야 할 명예, 자부심, 끈기, 근성 등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훈련을 시키다 보면 밤 11시가 훌쩍 넘어버리곤 했습니다. 사실 올해보다는 내년도 성적을 목표로 선수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기본기부터 훈련시켰는데 잘 따라 와 줘 고마울 따름입니다. 선수들이 힘들어 할때면 수시로 단체로 영화보러 가고 스파게티나 돈까스 등을 먹으며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고 동기를 부여해 주려 노력했습니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올 여름 지난 학기 초 완공된 인조잔디와 조명시설 덕도 톡톡히 봤습니다. 특히 이번 대회 예선전을 유치한 군산시와 문태환 군산시야구협회장, 나창기 호원대 감독님, 박성현 총동문회장과 진창엽 교장선생님, 학부모, 시민 모두가 합작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이번 대회 예선이 16강전까지 군산과 청주에서 나뉘어 치러지면서 안방에서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예선에서 탈락하면 낯을 들 수도 없는 만큼, 승리에 대한 부담과 책임감이 무거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8강에 올라 서울 목동야구장으로 가자고 했는데, 막상 8강에 오르니 고교 최고의 원투펀치를 자랑하는 동산고와의 경기였습니다. 현명(투수·3학년)이가 동산고에 완봉승을 거두면서부터 우승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진 준결승에서 초반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실수를 연발하며 5회까지 뒤지던 순간이 최대 고비였습니다. 역전 이후 상승세를 놓치지 않고 결승까지 이어간 것을 보면, 선수들에게 역전의 명수 자격을 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감독님의 야구 인생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군산 비행장 앞 옥봉초등학교를 다녔는데 3남 1녀 중 막내였던 제게 처음 야구공을 쥐어준 사람은 중학 시절까지 야구선수를 하셨던 아버지(고 석용순, 지난해 작고)였습니다. 부친께서 가능성을 보셨는지 4학년때 야구부가 있는 중앙초로 전학을 시켰는데, 당시 군산상고가 전국을 호령하던 때라 야구 인기가 엄청나 계속 테스트만 받다가 겨우 야구부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후 군산중에서부터 내야수로 뛰었고, 군산상고에서 제72회 전국체전 4강에 들면서 성균관대로 진학했습니다.

 

96년 쌍방울에 1차 지명돼 주전 3루수로 114경기에 나가 타율 2할6푼6리 3홈런 32타점을 기록하면서 그해 쌍방울이 첫 포스트시즌에 진출해 현대와 플레이오프를 치렀는데 2승 이후 내리 3연패했습니다. 당시 쌍방울에는 백인호, 김성래, 한대화 등 대한민국 내야수들을 대표하는 쟁쟁한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김성근 감독은 가능성 있는 신인선수들에게 엄청난 훈련을 시켰습니다. 매일 1000개 이상의 볼을 포구해야 했고, 결국 골반 피로로 부상을 입고 이듬해 고관절 수술로 1년을 쉬었습니다. 복귀를 앞두고 있을 때 대만에 프로야구가 생긴다며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 와 2억원에 계약했는데, 대만 지진으로 팀도 리그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선수로 내세울 것이 없던 터라, 남들보다 먼저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자고 마음먹고 1999년 성균관대에서 코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2011년까지 거의 매년 우승 준우승 등 성적을 거두면서 대부분 프로선수로 구성된 야구월드컵 국가대표팀 코치로 발탁됐습니다. 야구가 인생이고, 야구 밖에 몰라 야구 이외에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야구만 가르치라면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쌍방울 시절 대학 강사로 있던 집사람(서은주·40)을 만났습니다.집사람과 아들 주영(9), 딸 유연(3)이가 있는 전주 집에 한 달에 한두번 가면 매번 딸에게 원성만 듣죠."

 

-군산상고 야구 부활을 위한 방안이 있다면.

 

"모교에서 감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30대 초반부터 있었습니다. 막상 와서 보니 선수수급 상황이 최악이었습니다. 전임 이동석 감독님이 전국 각지를 떠돌며 선수를 끌어 모아 2010년 봉황기 준우승을 했던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우선 유망 선수들의 역외 유출을 막아보자며 도내 초·중학교 감독들과 만남을 계속 가졌습니다. 감독들도 적극 협조해 주셔서 지난해 도내 선수로 15명, 올해 20명이 왔습니다. 3학년 선수들의 진로도 진학의 주요 요소가 되는 만큼, 올해 9명 중 2명은 프로, 7명은 대학진학을 확정지었습니다.

 

일단 군산상고 야구선수가 된 순간부터 아이들에게 이제부터 개인 신분이 아닌 군산을 대표하는 공인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습니다. 선수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동기부여가 중요한데, 이번 우승으로 버스에 우승 플래카드를 달고 톨게이트부터 경찰 호위를 받은데 이어 시가지에서 카퍼레이드도 하는 등 이기는 야구를 해야 하는 이유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이런 경험은 경기에서 위기가 닥쳤을 때 헤쳐 나갈 수 있는 배짱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이기는 법을 알게 되고 자연스레 전통으로 이어지게 되죠. 올해 가을 마무리 훈련과 내년도 신입생들과 함께 하는 동계훈련을 소화하고 나면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특히 내년 3학년이 되는 이윤후, 김재호, 이우서, 김경철 선수 등은 큰 재목으로 성장해 있을 것입니다.

 

주제넘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선수들에게 야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운동장 문제는 해결됐지만, 역사와 전통에 비한다면 변변한 선수단 버스조차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또 기숙사 문제와 실력은 있지만 환경이 어려운 선수들이 마음놓고 운동할 수 있도록 장학재단 설립 등에 대해서도 주위의 뜻있는 분들과 계속 상의해 나갈 생각입니다."

 

● 군산상고 야구부는

 

- 68년 창단 18차례 정상 호남 고교야구 대명사

 

1968년 창단한 군산상고 야구는 '역전의 명수'로 불린다. 군산상고는 현재까지 전국대회 우승 18회, 준우승 10회, 3위 10회 등을 차지한 호남 고교야구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군산상고가 역전의 명수로 불리게 된 것은 창단 4년째인 1972년 7월 19일 '제26회 황금사자기 쟁탈 전국 지구별 초청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부터이다. 당시 국내 최강이었던 부산고와 결승전에서 맞붙은 군산상고는 1대4로 끌려가며 9회말 마지막 공격을 앞두고 있었다.

 

승부가 부산고 쪽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군산상고 선수들은 기적같은 역전극을 연출한다. 4대4로 동점을 만들더니, 2아웃 주자 2루 상황에서 기적같은 역전타를 터뜨리며 5대4로 승부를 뒤집어 버렸다. 당시 언론들은 '야구사상 일찍이 보기 드문 기사회생의 산표본'이라고 기록하며, 군산상고를 '역전의 명수'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군산상고는 특유의 끈기와 두둑한 배짱을 지닌 팀으로 성장하며, 숱한 스타플레이어들을 배출했다. '역전의 명수'라는 수식어를 앞에 달고 70~80년대 전국무대를 호령하며 군산을 상징하는 브랜드가 돼 버렸다.

 

하지만 시대를 풍미하던 군산상고는 1999년 황금사자기 우승 이후, 쇠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시민들을 안타깝게 했다. 10년 가까이 감독만 수차례 바뀌는 등 침체의 늪에 빠져있던 군산상고 야구는 지난 2010년 봉황대기 준우승을 계기로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인조잔디 운동장을 조성해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올해 초 운동장 정비가 마무리되면서 제대로 훈련을 소화한 역전의 명수들은 다시 전국 정상에 우뚝서는 저력을 발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