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함20(20대 인터넷 언론 매체)에 가보니 매뉴얼을 주제로 기획기사가 여럿 올라와 있다. 20대의 매뉴얼 강박증은 스펙 쌓기 경쟁에서 비롯되었으며, 때문에 매뉴얼을 따르는 것은 개인의 의지로 보기는 어렵다는 내용이다. 취직 준비 매뉴얼을 검색하니 기업마다 차별화한 적성검사 목록이 쭉 뜬다. 또 다른 세계를 본 느낌이다. 내가 아는 매뉴얼이라고는 스타크래프트 경기 방식 몇 가지였다. 흔히 테크트리라고 불렀는데, A테크트리로 경기를 운영하면 방어율이 높아지고, B테크트리를 타면 빠른 공격을 가하고, 저글링을 좀 더 생산하고…하는 식이었다.
떠올려보면 나는 꽤 오래전부터 매뉴얼과는 아주 먼, 갈팡질팡하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진학도 인문계, 상업계 선택지에 요리 특성화 학교까지 끼워 넣자 지친 담임선생님이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이과, 문과 선택으로 몇 주를 고민했다.
공부는 어땠느냐면, 수업 내용을 공책에 정리하다가 음악을 듣고, 창틀에 앉아 야자 시간을 보내고 몰래 나가 운동장을 뛰는 식이었다. 독서를 좋아해서 언어 성적은 괜찮았지만, 성적이 좋았을 리 없다. 대학교를 잘 다니다 돌연 취직을 해서 일 년 직장 생활 뒤에 재입학하기도 했다. 로드스쿨러들처럼 여러 학교의 강의를 경험해 보고 싶기도 하다. 요새는 어떤 일을 그만두어야 할지, 계속 해야 할지, 또다시 갈팡질팡하고 있다. 심리학 공부를 막 시작했는데 난생처음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공부와 일을 병행하기엔 내 몸이 하나라 아쉽다.
추석에 큰집에 가니까 어른들이 '슬슬 취직 걱정해야겠네'하고 말을 걸었다. 나는 '출판사나 방송사에 들어가지 않겠어요? 근데 소설가도 되고 싶고 그림이랑 디자인을 배워서 북디자이너도 하고 싶어요. 이상심리전문가도 재미있어 보이고요. 뭐 어떻게든 되겠죠?' 하고 답했다. 뜨악한 얼굴로 어느 하나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지 물어오는 분도 있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있을 리 없다.
소설 작법에서 우연은 찬밥신세다. 주인공과 기타 인물들은 늘 필연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 이야기를 맺기 위해 우연을 남발한 글이 있다면 합평 시간에 그야말로 가루가 되도록 혼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실제 삶에는 나처럼 갈팡질팡하며 우연과 의지 사이를 넘나드는 사람도 있다. 소설가 이기호와 극작가 버나드 쇼가 그렇다. 언젠가는 초록색 표지에 지은이 이기호라고 쓰여 있는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옆구리에 끼고, 버나드 쇼의 묘를 방문하고 싶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이다.
학보사에 들어오게 된 것도 대내외 활동 스펙 쌓기와 같은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친한 선배가 학보사 생활을 즐거워하기에, 그렇게 재밌나? 하며 기웃거린 게 여기까지 와 와버렸다. 덕분에 청춘예찬을 쓰는 기회도 얻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갈팡질팡해도 괜찮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