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5일부터 12월 10일까지는 세계여성폭력추방주간이다. 1991년 세계에서 활동하는 여성운동가들이 세계여성폭력추방의 날(11월 25일)부터 세계인권선언일(12월 10일)까지, 총 16일간 여성폭력을 추방하기 위한 공동행동을 하기로 결정한 이래, 한국여성의전화는 매년 이 기간 동안 여성폭력의 심각성을 알리고 근절하기 위한 캠페인을 전개해왔다. 가정폭력은 더 이상 가정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라는 인식에서, 내 가정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서 가정폭력으로 인해 고통을 받지 않는지 세심한 관심이 필요한 때이다. 세계여성폭력추방주간을 맞아 우리 지역의 가정폭력 문제를 짚어본다.
전주에 사는 문희자(48)씨는 늦은 밤 윗층에서 들리는 부부싸움 소리에 난감할 때가 많다. 아이들이 뛰어다녀 쿵쿵 울린다면 위층에 올라가 주의해 줄 것을 당부하겠지만 부부싸움의 경우, 남의 가정사에 끼어드는 것 같아 섣불리 참견하기가 어렵다.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릴 때는 올라가 볼까 하다가도 혹시 나중에 보복이나 화를 자초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애써 모른 체 한다.
하지만 한선미 전주여성의전화 부설 가정폭력상담소장은 가정폭력을 단순히 ‘집안일’ 쯤으로 여기는 사회 풍토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말다툼에서 시작된 폭력은 상대를 밀치고 뺨을 때리는 정도에서 점차 발로 차고 칼을 들고 위협하는 지경까지 발생하며, 견디다 못한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오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피해를 입은 당사자조차도 사적인 부부 싸움으로 치부해 버리며 밖으로 알려져 봤자 득이 될 게 없다는 생각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체면을 중시하는 분위기 탓에 외부에 폭력사실을 알리기를 꺼려하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폭력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할 사회적 범죄라는 인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상담하고 경찰에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한 소장의 말이다.
실제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전국 3800여가구를 상대로 조사한 전국 가정폭력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정폭력 가운데 부부폭력 피해를 경험한 여성의 62.7%는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이유로는 ‘폭력이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해’가 29.1%로 가장 높았다. 이어 ‘집안 일이 알려지는 것이 창피해’가 26.1%, ‘배우자를 신고할 수 없어서’가 14.1%, ‘자녀 때문’ 10.9% 순이었다.
우리 지역의 경우 2012년 전주여성의전화에 의뢰된 상담건수를 보면 전체 651건 중 가정폭력이 419건으로 가장 많이 차지했다. 내담자의 대부분은 피해여성이며, 폭력의 가해자는 대부분 배우자이다. 피해여성의 연령비율은 40대가 34%, 30대가 33%, 50대가 18% 순이지만, 연령이란 상담을 의뢰해 온 시점일 뿐 피해의 시작시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연령이 높을수록 폭력의 지속기간은 그만큼 길고, 피해가 깊은 것으로 해석된다. 피해유형을 보면 신체적 폭력이 39%, 정서적 학대 35%, 경제적 학대 17%, 성적학대 8% 순이다.
3년마다 실시되는 가족폭력실태조사를 보면 부부폭력 발생률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가정폭력방지법을 제정한 지 1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6가구 중 1가구에 신체적 폭력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가정폭력방지법의 한계가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가정폭력방지법이 피해자의 권리보장보다는 가정의 보호와 유지를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정폭력 피해자와 자녀들이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실질적으로 돕고자 한다면 당사자들에게 ‘왜 폭력을 당하는지’,‘왜 폭력을 당하고도 사는지’ 묻기 보다는 사회가 먼저 가정폭력에 대한 편파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한 피해자를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도록 법과 제도까지 점검해봐야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에 전주여성의전화는 지난 15일 지역사회에서 법 개정 필요성과 공감대를 확산하기 위해 ‘가정폭력 피해생존자 지원을 위한 관점과 실천’이라는 주제로 2차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발제자인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부설 오래뜰 관장은 해마다 가정폭력 발생률이 증가하는 것은 법집행 과정에서 피해자의 입장이나 가정폭력 피해의 특수성이 반영되기 보다는 성차별 인식이나 가정보호적 관점, 행정 편의적 사고가 드러나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주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가정폭력이 인권의 문제이며 사회적 의제임을 여론화하고, 가정보호와 유지의 관점이 아닌 피해자와 자녀들의 인권과 안전을 우선해야 한다며 법 개정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전주여성의전화 상담원 이형자씨는 내담자들이 대체로 참고 견디다보면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에 사태를 악화시키는 사례를 자주 접한다고 한다. 남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폭력이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면서 점점 심해지고 나중에는 폭력에 대한 죄책감마저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가정폭력은 엄연한 범죄이며 어떤 형태의 폭력도 우리 사회가 묵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분노와 미움이 가슴속 깊이 내재되어 있던 자녀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친구나 동생에게 폭력을 가하게 된다. 폭력가정에서 자라면 폭력을 문제의 해결방법으로 잘못 인식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폭력의 가해자는 폭력이 행해지는 상황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조절하는 능력이 부족하여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에게 체계적이고 전문화된 교정 치료프로그램을 실시하여 적절한 표현 능력과 합리적인 자기주장 능력을 높여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아내들이 폭력 상황에 혼자 남겨지지 않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지지를 보내야 한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이웃의 도움요청에 귀 기울이고 폭력적인 상황에 고립되지 않게끔 역할을 찾아야 한다. 죽음을 선택하거나 혹은 살인을 선택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안전망을 우리 사회가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전주여성의전화 상담전화 282-1366, 283-9855)
● 전주여성의쉼터 소장 "피해여성 신분 노출않는 게 원칙, 취업때까지 최소생계비 지원을"
“인터뷰이지만 제 이름이나 얼굴을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전주여성의쉼터 소장을 만났을 때 들려준 첫 인사말이다.
“가정폭력 피해여성과 자녀가 쉼터에 피신해 있는 동안 가해남편은 피해자의 친정이나 지인들 뿐 아니라 자녀의 학교와 경찰서를 찾아다니며 피해여성의 소재를 추적합니다. 아내의 가출로 인한 분노나 불안이 극에 달하여 집요하게 추적하는 과정에서 쉼터 종사자들도 위험에 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쉼터종사자들도 신분을 노출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는 전주여성의쉼터가 1999년 전주여성의전화 부설기관으로 개소하였지만 아직도 피해여성들이 쉼터에 대한 정보를 갖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한다. 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가출을 하면 처음엔 찜질방을 전전하다가 몸과 마음이 지치면서 잠자고 먹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절실하게 직면하게 된다고 한다.
쉼터에서는 무료로 숙식이 제공되며 교육과 상담프로그램을 통해 심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의료와 법률 서비스를 제공받으며 내년부터는 직업훈련도 받을 수 있다. 일시보호기간은 6개월이지만 3개월 연장이 가능하다. 가정폭력피해자 뿐 아니라 자녀도 동반 입소할 수 있다.
“대부분의 입소자들이 결혼 전에는 이러한 기관의 도움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지요. 뉴스에서나 들어본 얘기가 자신의 현실이 될 줄 어찌 알았겠어요? 쉼터에 들어와서 동료들과 서로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누다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남편들이 타인과 소통을 하는데 커다란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4년째 근무하고 있는 그는 쉼터와 같은 최소한의 사회복지시설이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피해여성은 물론 그 가족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하게 느낀다며 자립지원금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만기가 되어 퇴소하는 피해여성들에게 자립을 위한 최소한의 생활유지비가 필요합니다. 특히 자녀를 동반한 여성들이 이혼이 완료되어 취업할 때까지 최소 생계비를 지원하는 일은 생존과 결부되어 있는 중요한 문제입니다.”〈끝〉
이금주(주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