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정극인의 상춘곡 (상)] 처가 칠보에 '불우헌' 짓고 자연 벗삼아 안빈낙도 추구

상춘곡(賞春曲)의 작자 정극인(태종 1년 1401~성종 12년 1481)은 인간 세상, 특히 세조찬탈이란 정란 이후 온갖 시기와 질투, 모함이 득시글대는 벼슬세계를 떠날 때까지 간난신고의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세종 11년(1429}에 생원시에 합격을 했지만, 여러 번이나 과거에 실패를 거듭했다. 1437년 세종이 흥천사를 중건키 위해 토목공사를 벌이자, 태학생(太學生)들을 이끌고 그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북도(北道)로 귀양을 갔고, 그 뒤 유배 길에서 풀려난 후 처가가 있는 태인 칠보로 은거하여 동진강가 비수천에 ‘불우헌(不憂軒)’이란 초옥(草屋)을 짓고 향리자제들을 모아 가르쳤다.

 

단종 1년(1453) 52세 때 전시(殿試)에 응시하여 급제한 후, 전주부 교수참진사로 있다가 1453년 단종의 숙부인 세조에 의해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벼슬을 그만 두고 아내 박씨의 고향인 태인 칠보로 내려가 동진강가에 집을 짓고 세상의 근심 걱정과 관계가 없다는 뜻으로 그 초가집을 ‘불우헌’이라 칭하고 자신의 호로도 삼았다. 자연을 벗 삼아 그 속에서 스스로 즐거움을 찾아가며( 自娛自樂) 살아가는 동안 조선 가사문학의 효시(嚆矢)작인 상춘곡을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상춘곡은 세조정란 후 두 번 째 칠보로 귀향했던 그의 나이 54세 때 지은 것으로 생각 된다.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1455년 전주부 교수참진사의 직을 사임하고 다시 칠보로 은둔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불우헌 정극인은 좌익원종공신 4등을 받고 다시 10년간의 벼슬길에 올라 4번의 성균관 주부(主簿)와 2번의 종학박사(宗學博士)를 지내고 사헌부감찰, 통례문감찰, 태인현 훈도, 사간원헌납, 사간원정언을 끝으로 성종 1년(1470)산수가 수려한 칠보로 세 번째 은둔를 선택하였다.

 

소용돌이치는 그러한 정치의 격랑 속에 일찍 벼슬을 그만 두고( 引年致仕) 자연 속에 묻혀 산 그였으므로 세상의 부귀공명이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자신의 벗은 인간세상이 아닌 다만 청풍명월일 수밖에 없다고 토로하면서 세상을 등지며 살았다. 그리하여 표면상으로는 하늘과 사람을 원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기 때문에 누추한 거리에 한 줌의 밥과 자그만 표주박의 물(簞瓢陋巷)로 연명하면서 살았다. 그는 쓸데없는 인간세상의 명예나 부귀를 생각지 아니하며, 오로지 순진무구한 자연만을 즐기는 것으로 인생 백년의 행락(行樂)을 표방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홍진(紅塵)에 묻힌 분네

 

이내생애(生涯) 어떠한가

 

옛사람 풍류(風流)를

 

미칠까 못 미칠까

 

천지간 남자 몸이

 

날만한 이 많건마는

 

산림(山林)에 묻혀있어

 

지락(至樂)을 모를 것인가

 

(중략)

 

공명(功名)도 날 꺼리고

 

부귀(富貴)도 날 꺼리니

 

청풍명월(淸風明月)외에

 

어떤 벗이 있사올고

 

단표누항(簞瓢陋巷)에

 

허튼 생각 아니 하네

 

아무렴 백년행락(百年行樂)이

 

이만한들 어떠하리

 

발화자(發話者)는 흙먼지같이 더러운 티끌세상(紅塵)을 벗어나 이토록 아름다운 강산에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처럼 살아가는 자신의 삶이 어떠하며, 그리고 도연명과 같은 옛 사람의 풍류에 이를 수 있지 않느냐고 스스로 자문자답하는 선인(仙人)의 모습으로 갈아든다. 이어서 봄날 하루 동안의 흥취에 도취되어 신선처럼 살아가는 대목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인간세상의 부귀와 공명도 나를 꺼려 지나쳐버림으로 나와는 무관한 것이 되어버린다는 인간 본연의 회한(悔恨)이 진하게 서려온다.

 

인간세상의 부귀공명이 뜬구름 같고 자신과는 무관한데, 쓸데없이 그것에 매몰되고 갇혀서 근심과 걱정 속에 살아온 자신을 한탄하며 스스로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불우헌’이라 스스로 이름 짓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체험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인간세상의 부귀와 공명이 자신으로부터 떠나가질 아니하고 오히려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므로 그런 질곡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근심하는 내면의 모습이 드러나 안타깝다.

 

작중화자는 ‘청풍명월 외에 어떤 벗이 있사올고’라며 인간 세상에는 자신을 위로하며 동행할 수 있는 진정한 벗이 없고, 오로지 맑은 바람과 밝은 달(淸風明月)만이 자신의 벗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는 고산 윤선도가 오욕(汚辱)의 벼슬세계를 떠나 해남 금쇄동에서 ‘산중신곡(山中新曲)’을 지으며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변할 줄 모르는 수석송죽월(水石松竹月), 이 다섯의 자연물만이 내 벗이라 했던 ‘오우가(五友歌)’의 경지와도 같다.

 

또한 고려 말의 나옹선사(1320~1376년)가 56세에 남기고 간 선시(禪詩) ‘청산은 나더러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날더러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내려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같이 나에게 가라하네(靑山兮要我以無語 蒼空兮要我以無垢 聊無愛而無憎兮 如水如風而終我)’라는 속세를 떠난 티끌 하나 없이 청정무구한 경지가 연상된다.

 

이렇듯 스스로는 바람과 물처럼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과 같이 인간세상의 ‘허튼 생각을 아니하고 인생 백년의 행락이 이만한들 어떠하리’라며 위안하고 자족(自足)하려 짐짓 애쓰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면 그럴수록 상춘곡 내면엔 오히려 그러한 걱정과 근심을 떨치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작중화자의 모습이 역연히 드러나 근심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불우헌’을 무색케 한다. 차라리 ‘불우헌’이라기보다 세상의 부귀공명의 끈을 놓아버리지 못하고 한탄하고 근심하는 ‘우헌(憂軒)’이라 할 만큼 화자(話者)자신 내면의 진 모습이 엿보여 안쓰럽게 보이기도 한다.

 

국문학자·전주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