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먹을 즈음, 대리운전 문자 3통에 애경사를 알리는 문자도 있다. 주말 산행의 확인문자까지. 피할 길 없다.
산행에 동참한다. 나오니 좋긴 좋다. 고추에 된장, 멸치에 고추장 안주로 마시는 막걸리는 정상 확인의 묘한 성취감이 있다. 잔 들고 바라보니, 어라 부부동반 선후배들의 아웃도어에는 안주 색깔들이 골고루 들어있다. 아들이 입다 만 내 ‘북면(노스페이스)차림’에 비해 언제부터인지 거의 패션쇼다. 친구가 걸친 고상한 컬러에 세련된 디자인의 저 정도 바람막이는 거의 동남아 3박 4일 여행 ‘깜’인데….
바람막이로 대표되는 아웃도어 상의는 목까지 올라오는 딱단추를 닫으면 눈비도 비집고 들어오지 못한다. 소위 한계에 도전하는 옷들이다. 히말라야에서 입는다는 이건 구김도 안 간다. 오래 입어도 세탁할 일이 없다. 하여, 머시마부터 할배까지 안 입은 사람이 없다. 하긴 아웃도어가 경제를 살린다니, 내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옷은 연령층을 넘어 그 사람의 품성과 능력을 나타낸다. 게으른 학생은 입고 잔 추리닝 그대로 학교에 가고, 날씬한 여성은 아디다스 차림으로 백화점에 가도 된다. 그럼 아저씨들은? 등산복 바지차림으로 직장에 간다. 뻔뻔스럽다. 모두 편함을 추구하면서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는 옷차림이다. 이제 산타할아버지 의상도 아웃도어로 바뀐 광고가 나와도 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발가락 양말과 함께 개량한복을 피한다. 나이 들어 보이니까. 아니, 목이 쑥 빠지거나 맑고 깨끗한 심성이 받쳐줘야 되는 옷이니까. 양복은 거추장스럽고, 뭘 입나 고민이다. 청바지를 간신히 소화해 운동화를 신자니 키가 안 된다. 그렇다고 키높이 깔창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고 컨버스 차림으로는 옷태가 안 난다. 한옥마을이나 영화의 거리를 채우는 젊은 친구들의 야상재킷은 자신이 없고 그러다보니 나 역시 아웃도어차림이 제일 만만하다.
잘생긴 후배가 턱선이 무너지면 고소하다. 쪼잔한 남자의 질투다. 더한 것은 김광석 노래를 잘 부르는 이 친구가 주야장천 바람막이를 입고 다닌다는 것. 그래라. 다행이다. 락을 버리고 팝을 버리고 노래방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노래 뒤 트로트를 부르면서 우리는 아웃도어차림으로 만나고 있다.
이런이런, 나이 먹으면 중후한 신사가 될 줄 알았다. 근데, 이게 뭔가. 다행히 양복 권하는 사회는 아니어서 넥타이는 안 매도 좋은 시절을 살고 있는데. 그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선배 명퇴자들은 하나같이 아웃도어를 입는다. 울긋불긋한 차림에 비닐봉다리도 스스럼없이 막 들고 다닌다. 이 남자들 모두 도련님이고 엄친아인 시절이 있었을 텐데.
친구들아! 이번 동창들 송년회에 아웃도어는 제발 입고 나오지 말라. 당할 때 당할망정 명퇴복은 벗어버리자. 담배 사러 갈 때와 모악산 정상 막걸리 마시러 갈 때 외에는 입지 말도록 하자. 야상재킷으로 밀리터리룩을 소화하는 조영남 아저씨 차림은 못해도, 조금 불편한 옷차림으로 모이자. 어떻게? 후트티는 좀 그렇고 코트에 머플러다. 가방을 들으면 더 좋다. 거기 꼭 넣을 게 없다면 새해 달력이라도 몇 점 들고 와서 나누어 주시라. 아 참, 총무는 ‘아웃도어 금지’라고 문자에 첨언하라.
* 신귀백씨는 영화평론가. 평론집 〈영화사용법〉이 있다. 고 박배엽 시인의 삶을 조명한 장편 다큐 '미안해 전해줘'감독으로 직접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