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위기론에 시달리던 인문학이 요즘 들어 ‘열풍’에 가까운 인기를 누리고 있다. 언론사나 다양한 문화단체들이 마련한 인문학 강좌가 성황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이런 ‘위기론’과 ‘인기몰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현상이다. 위기임을 강조하는 것은 그 중요성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염려일 것이고, 이런 걱정이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그에 대한 호응 혹은 반응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이란, 한 마디로 우리들 삶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포괄적이며 체계적인 성찰이라 할 수 있을 터, 그 위기란 바로 우리들 자신의 삶을 단편적으로, 편협하게, 중구난방으로 성찰, 아니 방기하는 경향의 다른 이름. 개인의 취업에 함몰되어 그 가능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우리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조건에 무관심하거나 그 조건을 개선시키기 위한 사회적 노력에는 정작 등을 돌리는 젊은이들의 편향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프롬의 표현을 빌자면 ‘소유’(Having)에만 급급하여 또 다른, 좀 더 본질적인 삶의 전제인 ‘존재’(Being)을 돌보지 않는, 경제와 ‘실용’에 취해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이를 위한 민주주의도 법도 도덕도 헌신짝 취급을 하는, 우리들 모두의 뒤틀린 인생관 또한 인문학 위기의 또 다른 징후라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인문학의 위기는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다. 석가모니의 설법이나 공자님의 말씀, 예수님의 복음이나 소크라테스의 ‘변명’까지, 삶의 근원적 문제를 도외시하는 천박한 반인문학적 세태에 대한 질타에 다름 아니다. 돈이나 권력에 대한 욕심이 바람직한 삶을 오히려 방해할 뿐이라는, 그 분들의 숱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여전히 복음이요 금과옥조다. 단편적 지식이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염려에도 불구한고 효용성을 앞세운 분업의 분과학문은 지금도 ‘마이다스 손’처럼 장려되고 있다. ‘통섭’이나 ‘학제간 연구’가 전혀 새로운 개념으로 해석될 만큼.
하여 요즘 인문학의 인기몰이도 혹할 일이 아니다. 인생무상을 느끼기 시작하는 정년세대들의 교양교육에 대한 열망에 힘입은, 그것도 수도권 일부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일 뿐, 젊은 세대들에게나 지방에서는 여전히 좋지만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공자님 말씀’일 따름이다. 우리나라, 우리 세대의 일만이 아니라는 게 한 가닥 위안이라면 위안이랄까?
이종민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