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되돌아나오길 몇 번째. 비좁은 골목길로 올라갔더니 익산 여산초등학교(교장 오진탁)가 눈에 들어왔다. 면사무소 앞으로 새로운 문이 뚫렸지만, 과거 후문은 그 일대 학생들의 가장 가까운 출입구였다.
올해로 개교 101주년. 현재는 전교생 120여 명에 불과한 작은 학교가 됐지만, 자부심은 부침을 겪는 역사에도 스러지지 않는다.
여산초 안에 있는 익산 3·1 만세운동을 촉발시킨 헌병분견대 터, 가람 이병기 선생(1891~1968)이 작사하고 당대 유명세를 날렸던 이흥렬 선생(1909~1980)이 작곡한 ‘여산초 교가’는 과거 동문들과 현재 동문들을 잇는 온기있는 이야기다.
△학문중시 전통 배경 여산초 설립
여산초엔 의외의 드라마가 많다. 1906년 여산향교에 몸 담고 있던 김영진씨가 땅을 헌납해 설립한 것. 총동문회장 김장환 씨(48회)는 여산향교의 지리적 환경이 학교 설립까지 이어졌다고 전했다.
“여산초 뒷동네 마을엔 한지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과거엔 닥채나무로 불림)가 참 많았어요. 임방울 명창이 불렀던 ‘호남가’를 들어보면, 여산 숯돌로 칼을 갈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숯돌이 유명했죠. 종이·벼루 등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만드는 곳이었으니, 당연히 배움을 중요시할 수 밖에 없었죠. 학교가 설립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여산초 정문 주차장으로 쓰이는 헌병분견대 터에 설립한 여산독립만세기념비는 보훈처가 지정한 현충시설물이다. 1919년 성난 민중들이 헌경분견대로 돌진하며 “여산 독립만세”를 외쳤던 사건을 기리기 위한 것.
학교 옆 여산동헌(전북유형문화재 제93호)도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다. 전북향토지에 따르면 동헌에 현감부사 250명이 근무했었다는 기록은 과거의 위용을 보여주는 사례다.
“여산이 과거 호남의 첫 고을이었다”는 오진탁 교장의 단언을 빌리면 여산은 전북의 관문이면서 논산이 20㎞ 내에 있는 충남권이기도 하다. 지리적·문화적으로나 여산초 인근 문화콘텐츠를 엮어 새로운 관광명소로 발굴하자는 일각의 주장은 지금껏 9607명 졸업생(2월 기준)을 배출한 여산초가 단순히 쇠락해가는 학교로만은 바라볼 수 없는 이유다.
△학교를 빛낸 인물
여산초 졸업생 중 군장성 출신이 유독 많은 것은 “학교 옆에 있던 육군부사관학교 덕분”으로 돌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1951년 육군하사관학교로 창설, 여산초의 흥망성쇠와 궤를 함께 해온 것. 그 기(氣)를 받아 이남신 전 합참의장(43회), 유해근 전 특전사령관(45회) 등이 배출됐다. 하지만 현재는 그 명맥을 잇지 못하는 실정이다.
정계 인사는 드물다. 익산시의회 의장을 지낸 임귀택씨(60회)가 거의 유일한 정계 인사. 재계에선 이연 전 동원탄자 회장(32회)이 통 큰 기부를 많이 해왔고, 남민우 다산네트웍스 대표이사 사장(60회)가 벤처기업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있으며, 교육계 인사로 유인종 전 서울시교육감(31회)이 거론된다.
당시 명석한 법조계 인사로 기대를 모았으나 연좌제로 불이익을 받았던 송삼섭 전 일진그룹 고문(48회)은 지역에서 법률 자문을 해오며 의미있는 활약을 했다.
△오고 싶어하는 학교, 즐거운 학교 만들자
오진탁 교장은 “소통(疏通)만 되면 다 잘 굴러간다”고 했다. 학력 저하 우려 등을 하는 학부모가 여산초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 교장은 나눔과 배려의 교육현장을 더 중시했다. 한부모·다문화가정 등이 적지 않은 여산초로서는 학생들에게 ‘오고 싶어하는 학교, 즐거운 학교’를 만들고, 학부모들에게는 ‘가고 싶은 학교, 행복한 교육공동체’를 실현하는 게 더 근본적인 목표. 버스 2대로 학생들을 실어나르며 서양화·서예·태권도·바이올린 등 방과후수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당초 5~6학년으로 한정했던 진로지도를 4학년까지 확대하는 등 행복한 학교 만들기에 힘써오고 있다.
오 교장이 올해 역점 추진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6학년 제주도 수학여행이었다. “육·해·공 교통수단을 다 동원해 학생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추억을 선물했다. 그랬더니 1년 내내 들뜬 분위기가 이어져서 그게 고민”이라고 오 교장은 웃으며 말했다. 제주도 수학여행이 뭐가 대수냐는 반응도 있겠으나, 문화적 소외지역에 속하는 이곳 아이들이 느꼈을 상대적 박탈감을 누그러뜨렸다는 게 교사들의 반응. “학교 안 가면 심심해서 못 살겠다”는 학생들의 푸념을 듣고 싶은 게 이 학교의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