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장현경의 사미인가(思美人歌)] 좌천에도 임금 그리움·사랑 노래

영·정조때 장수 번암 출신

그리울사 우리 임금

 

뵈옵고저 우리임금

 

우리임금 성명(聲明)하셔

 

천지요 부모이시니

 

날 같은 미천신(微賤臣)을

 

무엇이 가취(可取)라고

 

이은(異恩)을 자주입고

 

연포(筵褒)가 정중(鄭重)하니

 

고신(孤臣) 일촌침(一寸枕)이

 

눈물이 바다이다

 

중략

 

중소(中宵)에 창을 열고

 

북신(北辰)을 바라보니

 

오운(五雲) 깊은 곳에

 

우리임금 계시고나

 

경루(瓊樓) 옥우(玉宇)에

 

추기(秋氣)는 추워지고

 

백로(白露) 겸가의

 

미인(美人)은 얼어있네

 

진령가 한곡조로

 

묘묘(渺渺)한 천일방(天一方)이

 

수문(隨門) 숙견을

 

몽매(夢寐)에나 찾을 손가

 

거연(遽然)히 잠이 들어

 

일침(一枕)을 일워시니

 

의연한 구일모양(舊日模樣)

 

입시(入侍)에 들었구나

 

용루(龍樓)를 높이 열고

 

옥좌(玉座)가 앙림(仰臨)도다

 

지척(咫尺) 전석(前席)에

 

종일을 근시(近侍)하니

 

천안(天顔)이 여작(如昨)하고

 

옥음(玉音)이 온순(溫詢)한데

 

촌계(村鷄) 한소리에

 

홀연히 깨달으니

 

심신(心神)이 창망하여

 

눈물이 옷에 젖네

 

군문(君門)이 여천(如天)하여

 

다시 들기 어려울세

 

꿈이나 빙자(憑藉)하여

 

우리임금 보는 것을

 

계성(鷄聲)은 무슨 일로

 

꿈조차 깨우는고

 

방황(彷徨) 종야(終夜)에

 

이 마음 경경(耿耿)하다

 

종남산 불로(不老)하고

 

한강수 도도(滔滔)하니

 

슬프다 이내생각

 

어느 때 그치일고

 

작자 추담 장현경(張顯慶 1730-1805)은 본관이 흥성(지금 고창 흥덕)이며, 영조 6년에 전북 장수 번암에서 태어났다. 22세 때인 영조 28년에 정시(庭試) 병과에 16등으로 급제하여 춘추관 기사관 겸 홍문관 박사, 춘추관 기주관(記注官)과 편수관을 지냈다. 정조 20년(1796년)에 삼례 역승(驛丞)으로 좌천되었으나, 임금에 대한 원망 대신 오히려 임금을 그리워하는 연군류 32구의 가사 ‘사미인가(思美人歌)’를 지었다. 이 작품은 필자가 오래전 <한국문학지도> (1996, 계몽사, 56-57쪽)에 소개한 것으로 송강 정철이 전남 담양 창평에서 임금을 그리워하며 노래한 ‘사미인곡’, ‘속미인곡’의 전범을 이은 사미인계의 연군류의 가사로서 국문학적 가치가 인정된다.

 

이 두 작품의 작자가 임금의 총애에서 소외된 환경과 처지가 서로 동질적이지만, 임금을 조금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오로지 여성화자의 목소리로 임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을 노래한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라는데 큰 의의를 둘 수가 있다. 사미인계 시가의 원천은 굴원의 초사(楚詞) 가운데 ‘사미인(思美人)’에서 찾을 수 있다. 굴원이 노래한 미인(美人)은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라 임금을 지칭한 말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사미인계 노래 내면에 흐르는 정조(情調)는 대부분 여성적인 톤을 지니고 있다. 여성적인 목소리이어야만 자신의 절절한 마음을 임에게 전달하는데 가장 큰 호소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미인계 가사는 송강 정철의 양미인곡인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거연히 잠이 들어 일침(一枕)을 일워시니/ 의연한 구일모양(舊日模樣) 입시(入侍)에 들었구나/ 용루(龍樓)를 높이열고 옥좌(玉座)가 앙림(仰臨)도다/ 지척(咫尺) 전석(前席)의 종일을 근시(近侍)하니/ 천안(天顔)이 여작(如昨)하고 옥음(玉音)이 온순(溫詢)한데/ 촌계(村鷄) 한소리에 홀연히 깨달으니/ 심신(心神)이 창망하여 눈물이 옷에젖네’라는 정조는 송강의 ‘속미인곡’ ‘적은 덧 역진(力盡)하야 풋잠을 얼픗 드니/ 정성이 지극하야 꿈에 임을 보니/ 옥 같은 얼굴이 반이나마 늙어세라/ 마음에 먹은 말씀 슬카장 살자 하니/ 눈물이 바라나니 말씀인들 어이하며/ 정을 다 못하여 목이조차 메여하니/ 오전(誤傳)된 계성(鷄聲)의 잠은 어찌 깨웠던고’와 동질적이다.

 

오매불망 임금을 그리워하여 잠 못 드는 불면의 밤을 지내다가 잠시 옛 모습 그대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꿈결 속에 젖어든다. 그런 자신을 홀연히 깨운 건 촌닭의 울음소리다. 새벽인줄 잘 못 알고 울어버린 닭의 울음소리에 꿈을 깨면서 임금과 나누었던 군신간의 정이 단절된다. 다시 외롭고 답답한 현실로 되돌아오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닭에게 원망을 보내는 화자의 모습이 오히려 안쓰럽다. 그러하니 마음과 정신이 슬프고 가련하여 눈물로 옷깃을 적신다는 안타까움은 ‘심신이 창망하여 눈물이 옷에 젖네’라고 절절히 노래할 수밖에 없다. 이는 송강이 잠깐 풋잠이 들어 꿈속에 임금을 만나서 군신간의 정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데, 때 이른 닭 울음소리에 잠에서 깨어나서 답답하고 어두운 현실을 깨닫게 되는 속미인곡의 정조(情調)와도 궤를 같이 하는 애닮은 상사지정(相思之情)이다.

 

영조 39년(1763년) 겨울가뭄이 극심했는데 동짓날 눈이 많이 내리자 영조는 친히 춘추관에 나와 잣죽과 꿩구이를 내려 격려하였다. 그러므로 장현경이 이에 감복하여 ‘백설(白雪)’이란 율시를 지어 바치자, 영조도 기뻐하며 한시를 친히 써서 이에 응답해 주었다. 장현경은 말년인 정조 23년(1799년) 고향인 장수 번암에 어서각(御書閣)을 짓고 영조가 자신에게 하사한 친필 어서를 자신이 지은 ‘백설’과 함께 잘 보관하였는데 2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대로 잘 전해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장수군 산서면 오성리에도 태종 이방원이 사간공 안성(安省)에게 내린 왕지(王旨)를 보관한 어필각(御筆閣)이 세워져 영조의 어서각과 더불어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국문학자·전주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