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속의 새봄

▲ 조윤수

겨울 속에서 봄을 캔다. 지난번의 혹독한 추위와 폭설의 자취가 산그늘에 희끗희끗 남아 있다. 화분 갈이를 하려고 흙을 담으러 내려왔다가 밭두둑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냉이를 발견했다. 두껍게 쌓였던 눈 속에서도 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흙을 털자 뿌리는 하얀 맨살을 드러냈다. 추위를 이겨낸 냉이가 향긋한 봄 냄새를 풍긴다.

 

눈이 쌓이고 땅이 얼게 되면 모두 출퇴근 차량 운행에 긴장해야 한다. 도시인들은 단 하루도 백설 속에서 마음을 비울 시간조차 없다. 길이 막혀서 소동이 일고 교통사고가 여기저기에서 터지기 일쑤다. 그래도, 그리움의 정령들이 춤추는 듯 눈 내리는 하늘을 볼 때 아! 하는 그 첫 느낌은 놓치지 말일이다.

 

물탱크에서 내려오던 호스가 얼었었다. 폭설이 연이어 내렸던 그 겨울, 처마 밑의 고드름은 옛사람의 고향이었다. 날이 풀어져야 호스는 녹았다. 마당 가운데 있던 수도에서 물을 받아다 집안의 물독에 담아두고 사용해야 했다. 춥고 불편했던 일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그 순백의 향연을 어찌 생활의 불편 때문에 투덜대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오랜만에 보는 눈꽃들의 세상 나들이가 아닌가. 기쁘게 축제를 벌이자고 눈발은 나를 꼬드겼다. 생활의 번거로움과 분주함도 이 고요한 순백의 평화에 스르르 잠겨들 수밖에 없었다.

 

백설은 순백의 나라를 연출한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렸던 백설의 하강이었던가. 그래서 내려올 때 그토록 살풀이하듯 윤무(輪舞)를 즐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쌓인 눈은 사랑의 덩어리였다. 사랑으로 하나 되고 사랑의 힘을 확인한 적설(積雪)은 새 삶을 꿈꾼다. 가을이면 돌아가야 할 사연을 안고 왔던 푸른 잎처럼 적설도 본래로 돌아가야 하리라. 햇볕을 받아 녹으면 땅을 적시고 땅속으로 스며들어 생명수로 흘러야 한다. 만나는 풍광을 감격의 눈물로 맞이한다. 계곡을 따라 흐르며 숲의 정령들과의 은밀한 랑데부도 즐기리라. 시냇물이 되어 멋진 바위와도 만나고, 청아하게 흐르는 소리를 내며 달빛을 적시리라. 드디어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되어 사공의 뱃노래에 한 숨 돌리기도 하겠지. 때로는 벼랑에서 천둥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수가 되어 아름다운 곡예(曲藝)도 펼친다. 바다에 이르기까지 물은 귀향가(歸鄕 歌)를 읊조리리라.

 

거실 가득 들어온 햇살이 포근하다. 잠시의 향연은 언제나 찬란했다. 묵묵히 기다렸던 태양의 따사로움은 또 얼마나 고마운가. 눈의 잔치는 뒤풀이를 아쉬워하는 듯하다. 그렇다. 축제는 늘 그렇게 왔다 가는 것이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름다운 것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그리고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란다. 육신으로는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갈구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끝없는 인간의 욕심은 엄연한 생명의 순환법칙까지도 마음대로 조종하고 싶어 한다.

 

얼마 전, 신문이나 TV 뉴스에서는 인간복제 이야기로 떠들썩했던 적이 있었다.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질서를 잃어 가면서 눈앞의 시급한 문제들만 해결하려는 욕심에 사로잡힌다면 엄청난 혼란을 일으킬 것은 뻔한 일이다. 인간성의 회복이 시급한 현대에 더욱 타락의 길을 재촉하는 과학기술이 된다면 인류의 발전을 꾀하는 과학이 앞으로 큰 재앙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연일 눈이 내리던 어느 날, ‘아! 이 적설이 녹지 않으면 어쩌랴!’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것은 마치 생명이 태어나기만 하고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상상해 보라. 순리대로 순환되고 있는 생명의 법칙이 얼마나 은혜로운가. 순리에 역행하려는 인간만이 괴로울 뿐이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차원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잃어버린 에덴의 동산을 회복하여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하리라. 생명나무를 찾을 수 있는 밝은 혜안이 필요할 것 같다. 육신으로는 단 한 번뿐인 생이다. 천수를 다할 때까지 서로에게 아쉬움을 남기지 않는 삶을 영위했으면 좋으련만. 사람이 무덤으로 돌아갈 때 생의 찬미를 부르며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백설의 귀향(歸鄕)처럼….

 

잔설 속에서 캐낸 냉잇국이 새봄의 서곡이 되어 내 안에서 감돌아 흐른다.

 

* 수필가 조윤수씨는 2003년 〈수필과비평〉으로 등단. 〈바람의 커튼〉 〈나도 샤갈처럼 미친(及) 글을 쓰고 싶다〉 〈명창정궤를 위하여〉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