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만의 회향전 마친 김병종 교수

"고향 첫 전시회… 마음속 그리움이 설렘과 즐거움으로"

▲ 한국화의 새 지평을 열어온 화가 김병종 교수의 회향전이 지난 16일 막을 내린 가운데 김병종 교수가 전북도립미술관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개막을 하루 앞둔 전시실은 부산했다. 화가의 그림을 넉넉하게 품은 다섯 개 전시실이 30여년 세월을 교직하며 어깨를 잇는 동안 모악산의 기운은 생동하는 듯 공간을 가로 질렀다. 해가 엎드려가는 늦은 오후, 서울에서부터 달려온 관객이 있었다. 다음날 폐암수술이 예정되어 있는 시인이었다. ‘수술 받는 병실에서 이 그림을 생각하며 기운을 받고 싶어’전주행 고속버스를 탔던 시인은 잰걸음으로 전시실을 돌아보았다. 되돌아가는 시인의 걸음이 가벼웠다. 지난 16일 끝난 김병종 교수의 회향전이 열린 전북도립미술관의 한 컷 풍경이다.

 

김병종 교수(62, 서울대 미술대)가 30년 화업의 의미를 담아 올해 초 고향에서 처음으로 회향전(回鄕)을 열었다. 전북도립미술관 5개 전시실과 전주한옥마을의 교동아트미술관을 가득 채운 그의 그림들은 많은 관객들을 감동시키고 열광케 했다. 전시는 한 달을 훌쩍 넘기는 짧지 않은 일정이었지만 관객 행렬은 이어졌다. 엄마 따라 온 초등학생은 ‘그림이 너무 재밌다. 나도 화가가 되고 싶다’는 글을 남겼고, ‘바보예수’ 연작이 놓인 전시실을 돌아보던 50대 관객은 끝내 눈물을 흘렸다.

 

80년대부터 시작된 그의 화업 노정은 늘 빛났다. 그의 작업은 고난을 마주했을 때 더 힘을 얻었다. ‘바보예수’ ‘생명의 노래’, 그리고 다시 만난 ‘길 위에서’의 연작은 10년을 주기로 그의 분출하는 창작 열정을 담아 우리 앞에 놓였다. 돌아보니 그의 작업에 국내외의 평론가들이 주목하며 헌사를 올리는 이유가 있었다. 늘 한 장르와 한 소재에 머무르지 않고 실험적인 영역에 도전해온 예술정신은 한국화의 새 지평을 열어 세계를 주목하게 했다.

 

전시 막바지, 화가를 만났다. 인터뷰의 대부분 시간이 화가의 유년에 놓였다. 그 기억은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이거나 에너지로 차고 넘쳤다. 그의 화폭에 ’생명’이 넘실거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회향’의 의미가 각별하게 와 닿는 전시였습니다. 전시회 또한 기대 이상의 많은 관객들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외형적 성공도 그렇지만 교수님께는 특별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털어놓자면 이처럼 훈훈하고 아름다운 전시를 또 어디서 할 수 있을까 할 만큼 만족스러운 전시였습니다. 작가로서는 대단히 축복받은 기회라고 할 수 있죠. 전시실과 작품이 이처럼 잘 소통될 수 있을까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작품을 펼쳐놓은 전시실에 처음 들어섰는데 모악산의 어떤 신비한 기운이 전시공간에까지 들어와 가득 차있는 느낌이 있었어요. 굉장한 경험이었습니다.”

 

-도립미술관의 공간성에 대한 새로운 발견입니다. 처음 도립미술관을 이곳에 지을 때 지역사회로부터 엄청난 저항이 있었거든요.

 

“미술관의 역할로 보자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에 받은 느낌은 사뭇 다릅니다. 유명한 건축가들이 지은 대도시의 아름답고 세련된 미술관은 얼마든지 많이 있죠. 이즈음에는 미술관이 본래의 기능에 충실한 미술관보다는 아무개 건축가 작품으로 브랜딩 되면서 정작 그 공간에 전시되는 미술작품들은 종속품으로 존립하게 된 경우가 많습니다. 도립미술관은 그런 미술관과는 달리 관객들이 작품으로 만나고 어우러질 수 있게 하는 공간성이 돋보이는 곳이더군요. 전시장을 다녀간 전문가들도 한결같이 그런 독특한 분위기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전시회의 여진이 상당히 큽니다.”(웃음)

 

-그 어느 때보다도 설레였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외국의 이름난 미술관이나 갤러리 초대전과는 어떤 점이 달랐는지 궁금합니다.

 

“전시 할 때 작가는 늘 공간을 염두에 둡니다. 독일의 구아르니미술관, 파리의 몽뜨니나 가나보부르 갤러리, 헝가리의 기욜시립미술관 등에서도 전시 했지만 500호 1000호를 비롯한 대작과 화업 30년을 읽어낼 수 있도록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내는 공간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전시는 공간 규모도 그렇지만 특히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지면서 따뜻한 기운이 소통하는 전시는 아니었어요. 작품을 내보이고 관객들이 왔다 흩어지는 통상적 전시랄까. 그래서 저의 사적 비전을 전시를 통해 공적 논리화 시키는 이런 대규모 전시로 연출된 유니크한 분위기가 더 강하게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

 

-관객들의 반응도 특별했습니다. ‘바보예수’ ‘’생명의 노래‘ ’길 위에서‘로 이어지는 연작의 스펙트럼이 주는 감동이 워낙 강했던 것 같은데, 그림이 관객들과 어떻게 소통되기를 원하십니까.

 

“사실 작품에 몰두하면 완전히 자아중심적이 됩니다. 관객들과 소통하겠다는 의지까지 미치지 못하죠. 주관적인 어떤 느낌 속에서 만들어내는 작품에 공감하고 호응해주는 관객들의 반응은 그래서 더 큰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험은 물론 국내보다 외국 전시에서 더 크게 와닿습니다. 그런데 작품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을 지난 30여 년 동안의 여정 속에서 돌이켜보면 다양한 울림으로 왔던 것 같습니다. ‘바보예수’ 연작은 초기에 대단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어요. ‘바보’라는 단어가 ‘신성모독’이 아니냐는 지탄부터 거칠게 부딪쳐 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바보예수’라는 명제가 갖는 상징성을 이해하고, 오히려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관객들이 많습니다.”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던 부분까지 끄집어내는 관객들, 진정성을 갖고 진솔하게 그림과 교유하는 관객들의 늘어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겠죠.

 

“물론입니다.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 동력 중의 하나가 바로 그런 관객들을 만났을 때예요. 저를 다시 일으켜주는 에너지를 제공하거든요.“

 

-관객들과의 소통을 이야기하자면 ‘화첩기행’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화첩기행’은 지금껏 시도된 기행문학 중에서도 ‘화첩’이라는 형식을 새롭고 독창적인 영역으로 확대시키면서 ‘낙양의 지가’ 를 올렸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인기를 얻었죠.

 

“두려울 만큼 독자들의 반응이 높았었습니다. 사실 저의 40대와 50대의 가장 굵은 지점이 온전히 ‘화첩기행’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죠. ‘화첩기행’은 제가 내밀하게 실험해왔던 결과물입니다. 문학소년, 문학청년기를 보내면서 안고 있던,‘문학’이라는 가지 않는 길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이 책을 만들었습니다. 늘 수채화 같은 문장과 시 같은 그림을 한 화면에 놓을 수는 없는 것인가 생각했거든요.”

 

-이번에 북아프리카기행을 담은 5권을 내면서 예전의 ‘화첩기행’을 전면 개정해 출간했는데 개정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첫 권을 낸지 15년 지나니 내용의 보완이 필요했습니다. 5권을 펴내면서 이 기회에 내용도 보완하고 전집 형식으로 구성했어요. 처음 책이 나왔을 때 보여준 열광적 반응은 아니지만 독자들의 관심이 기대 이상으로 높다고 합니다. 옛 가수가 다시 무대에 선 것처럼 긴장도 되는데, 제 작품에 대한 순수한 독자층과 색깔 있는 문장에 호응하는 독자층이 어우러지면서 제게 글을 쓰게 하는 힘의 동력이 됩니다.”

 

-그림은 물론이고, 교수님의 강연을 듣거나 글을 보면 고향과 유년의 기억이 유독 짙고 깊습니다. 유년의 기억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열두 살, 열세 살까지의 삶이 한 사람의 생애를 책임 짓는다고 생각합니다. 제 작품의 주제, 이를테면 ‘바보예수’나 ‘생명의 노래’ 연작의 원소도 모두 유년시절의 종교체험과 자연체험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죠. 연을 날리는 실이 연자에서 풀려나듯이 그림의 근원을 좇아가보면 역시 연자에 감겨있는 실처럼 내 유년의 나날들이 거기 감겨 있습니다. 지리산의 부성적 강인함과 섬진강의 모성적 푸근함에 제 유년시절이 놓여있습니다.”

 

-화가로서는 매우 소중한 체험이었겠습니다. 오늘의 김병종을 있게 한 유년의 체험이 그래서 더 궁금해집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유난히 그림그리기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그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죠. 아버님이 열 두살때 돌아가셨는데, 집안 어른들은 집안이 기울어지는 것과 제가 그림을 그리는 것의 관계를 특별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환쟁이를 만들 수는 없다 싶었겠죠. 그래도 늘 그림을 그렸어요. 땅에도 그리고 허공에도 그렸죠. 그러다가 들키면 쥐어 박히는 일이 허다했는데, 그 어린나이에 나는 이 길을 갈 수 밖에 없나보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러한 예술적 재능은 누구로부터 받았습니까.

 

“제 기억으로는 아버님이 취미로 사군자를 그리셨어요. 제가 열두살 때 돌아가셨는데, 학교 가다 다시 돌아와도 혼내지 않고 오히려 잘했다고 해주셨죠.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3남 3녀를 키우셨는데, 그만큼 힘이 드셨을 텐데도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결코 부유하지 않은 생활이었는데도 그런 환경을 절감하지 못할 정도로 늘 낙천적이고 긍정적이셨어요. 우리 형제가 모두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떤 어려움을 마주해도 그 어려움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관점이 있습니다.”

 

-어머니도 그림 그리는 일을 반대하셨습니까.

 

“반가워하지는 않으셨죠. 제가 엉뚱한 일을 많이 했거든요. 중학교 2학년 때 했던 전시회 주제가 ‘유혹’이었어요. 어른들 눈으로는 이상한 그림들이었죠.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려 팔고, 만화나 부교재를 그대로 그려 아이들에게 반값으로 팔기도 했어요. 펜으로 똑같이 그린 책이니 아이들은 좋아했지만 부교재를 권한 체육선생님은 아주 기분 나빠하셨죠. 이런 일들이 어머니와 형님들의 귀에 들어가면 상심이 컸습니다. 그래서 더 강압적으로 그림을 못 그리게 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유년의 나를 알릴 수 없는 곳, 이해받을 수 없는 곳, 억압된 곳이란 인식이 제 삶에 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으로 작용해왔던 것 같아요. 아직도 열두 살 어린아이가 자라지 않고 내면에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도 그림 그리는 일을 끝내 놓지는 않았군요.

 

“그림에 대한 욕구가 봇물 터지 듯했거든요. 나름대로 절제는 했지만 장강대하처럼 나오는 욕구를 통제하기 힘들었죠. 그런 열정은 지금도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교수님의 엄청난 작업양은 어린 시절부터 지속되어 온 것이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강의실에 들어갈 때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가르치는 일에 대한 희열 때문이 아니라 반짝이는 제자들에게 뒤지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죠. 그래서 ‘제대로 했느냐’고 하면 명쾌하게 답할 수는 없지만 양적인 면에서라도 뒤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해온 것 같긴 합니다.”

 

-이번 전시는 한 화가의 화력을 들여다보는 의미로서 뿐 아니라 ‘고향’과 ‘유년시절’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들 합니다. 그동안 연작들이 10년을 주기로 새롭게 등장했지만 그 중심을 관통하는 주제는 역시 ‘생명’입니다. 그 원소 역시 유년시절로부터 나온 것이겠지요.

 

“물론입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서울대 미술대 출신 중 외국으로 가 다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기 발전을 위한 일이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자기세계를 찾는 일은 감성의 문제입니다. 예술가가 자기만의 원소를 발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죠. 내 경우에는 ‘생명’이라는 원소를 모으기 위해 외국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내가 지닌 토속적 정서 속에 널려있는 자원과 재료들이 아직도 무궁무진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이곳을 고향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축복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 작업을 통해 연자에서 실이 풀려나오듯 끊임없이 서로 먼저 다투어 나오려고 하는 것들은 결국 유년의 체험과 상상력의 응축이고 소산이예요.”

 

-남원에 건립되고 있는 미술관에 관심이 높습니다. 미술관 하나가 도시의 문화를 이끌고 발전시키는 선례가 많이 있더군요.

 

“유년을 보낸 고향 남원은 특별한 도시였습니다. 유년의 나날들에 자연이 주는 풍성한 감성과 색채는 넘쳐났는데 문화적인 공간이나 체험은 전무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서 좁고 답답한 고향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그림 그리는 일을 반대하고 핍박했던 것도 문화공간의 부재에서 온 것 일겁니다. 저의 어린 시절 야생의 들풀처럼 아무런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좋은 체험을 돌려주고 싶다는 바람이 큰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예산 규모는 다른 미술관에 비해 아주 적던데 그 역할에 대한 지역사회의 기대는 커서 부담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국에서 제일 작은 미술관이 될 것 같아요. 적당한 규모가 필요하지만 어떤 콘텐츠로 미술관을 구성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여서 규모에만 연연하고 싶진 않습니다. 남원이 지닌 문화적 잠재력을 이 공간에서 키워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전시 못지않게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구성해 남원 문화를 이끌어가는 예총과도 교류하면서 유니크한 공간으로 운영해볼 생각입니다. 마침 남원시에서 복합문화공간인 ‘한타운 아트밸리’를 조성하고 있는데 소리문화체험과 도예가들의 작업장, 고서점과 자연캠프 등이 들어선다고 하더군요. 제가 구상하고 있는 미술관의 프로그램이 이 공간들과 결합하면 더 좋은 인프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김교수는 이번 전시에 대한 감회가 특별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그는 “30년 작업을 한자리에 펼쳐놓고 보니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몽롱했던 행선지가 보인다”고 말했다. 그가 다시 열어놓을 새로운 길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 김병종 교수는 한국화 새 지평 연 '화첩기행' 화가로 유명

김병종 교수(서울대 미술대)는 1953년 남원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책읽기와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했던 그는 책이 많았던 친구 집에서 빌린 책들을 가리지 않고 읽으며 책읽기의 갈증을 풀었지만 그림그리기는 아이의 재능을 미리 막고자 했던 집안 어른들의 강한 반대로 늘 경계의 대상이 됐다. 열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장이 된 어머니도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품이었지만 막내아들의 재능을 응원하진 않았다. 그럴수록 ‘장강대하’처럼 분출되는 욕구는 스스로도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넘쳐 중학교 2학년 때 남원 시내 다방에서 첫 전시를 열고 시집을 펴냈다.

 

늘 그림을 못 그리게 되지는 않을까 조바심으로 불안했던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찬밥 비벼먹고 완행열차 타고 영등포역에 내렸다. 좋은 그림 그리는 화가가 되겠다는 각오는 여물고 단단한 것이었으나 그에게 그리는 일은 ‘잘 해보라’는 응원을 받으며 해온 일이 아니라 눈물겨운 간절함으로 해온 절박한 일상이었다.

 

지금도 그림을 못 그리게 되는 악몽을 꿀 정도로 그리는 일에 대한 핍박은 ‘트라우마’가 되었지만 서울대 미술대를 들어간 후 재능은 제대로 빛을 냈다. 전국대학미전에서 대통령상을 받고 시와 소설로 서울대문학상을 휩쓸었으며, 희곡 여러 편이 무대에 올려졌다. 동아일보 (1980)와 중앙일보(1981)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대한민국문학상과 삼성문화재단 저작상 등의 수상작가로서도 이름을 알렸다. 90년대 후반에는 글과 그림을 아름답게 조화해낸 ‘화첩기행’으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기행문학의 여정은 지금까지도 계속돼 최근 북아프리카기행으로 다섯 번째 ‘화첩기행’을 펴냈다.

 

80년대, 작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새로운 형식과 명료한 주제의식으로 한국화의 새 지평을 열어왔던 그는 가장 한국의 원초적 정서를 다양한 형식에 담아내면서 국내외 평론가들의 관심과 헌사를 받아왔다. 프랑스 헝가리 영국 미국의 이름난 미술관과 갤러리가 그를 초대했으며 런던의 대영박물관을 비롯해 세계의 주요 미술관과 기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서울대 미술대 학장과 미술관장을 지냈으며 30년 동안 가르치는 일을 해오면서도 반짝이는 제자들에게 뒤질까 두려워 그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남원 송동면에 2016년 문을 열 작고 아름다운 미술관이 건립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