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을 앞두고 독도 영유권과 위안부 할머니 등에 대한 일본의 망언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일제에 의해 잔혹하게 학살당한 전북지역 항일의병장 5명의 기록이 공개됐다.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항일투사들의 자료를 모아온 정재상 경남 하동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은 27일 항일의병장과 무명항일투사 학살 관련 문건을 공개했다. 정재상 위원장은 이 문건을 토대로 지난 4일 전북출신 항일의병장 5명을 포함한 의병장 41명에 대해 정부에 서훈을 신청한 바 있다.
정재상 위원장이 찾은 문건에는 구한말 을사늑약(1905년)이후 1907~1909년 국내에서 50~400여명의 의병대를 조직, 무장투쟁을 벌이다 체포된 항일투사 218명이 일제에 의해 잔혹하게 학살된 기록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특히 전북에서 활동한 의병장들은 본보기로 처참하게 처형됐다.
장수 출신의 박재근(朴在根·생년미상~1907)의병장은 1907년 장수남방 백암(百巖)에서 체포돼 일본군의 모진 고문 끝에 깔에 찔려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 박재근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 초부터 의병 100여명을 규합해 장수, 무주, 남원 등을 중심으로 덕유산과 지리산을 넘나들며 대일 항전의 기치를 올렸다.
진안 경찰서와 우체국 등 당시 일제의 통치 조직을 습격해 공을 세운 김진명(金辰明· 1863~1907·진안) 의병장도 체포 당일 고문을 받은 뒤 목이 잘려 순국했다. 1908년 체포된 이내구(李內逑·출생미상~1908·전주) 의병장은 체포되자마자 총살됐다.
일본군에 잡히지 않고 전장에서 순국한 전북출신 의병장에 대한 기록도 공개됐다.
마중길(馬中吉·생년미상~1908·무주) 의병장은 1907년부터 지리산 일대인 무풍장(茂豊場) 등지에서 의병장 이장춘(李長春)등 300여명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수차례 격전을 벌이다 1908년 5월16일 무풍장 북방 1500m 흑석(黑石)에서 전사했다.
안내성(安乃成·생년미상~1909·전북 재동 계수역(남원 추정)) 의병장은 1907년부터 남원 지리산을 중심으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결사항전을 벌였다. 그러다 1909년 1월16일 계수역(契樹驛) 북방 약 20리 부근인 재동(在洞)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동지 5명과 장렬히 전사했다.
정재상 위원장은 “일제가 작성한 ‘진중일지(토지주택박물관 소장)’와 ‘폭도에 관한 편책(국가기록원)’, ‘조선 폭도토벌지’ 등에서 전북출신 항일의병장 5명을 포함한 의병장 41명과 무명항일투사 218명의 학살문건을 찾았다”고 밝혔다.
이어 정 위원장은 “자료에 드러난 의병장의 학살은 ‘도주를 기도함에 죽였다’고 상부에 보고했는데, 항일의병장을 죽이는 명분이 모두 도주라는 말도 안 되는 표현을 쓰며 항일투사들의 학살을 자행했다”면서 “체포된 항일의병장을 고문한 후 마지막에는 목을 자르고, 머리를 박살내 죽여 놓고 그들이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자살했다 등으로 폄하해 기록해놨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