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후손-손화중 장군] 최연소 '5대 장군'…후손 "기념일만 집착하는 세태 씁쓸"

교인 1만명 거느린 대접주, 인품·학식 갖춰 / 혁명 당시 34세…든든한 후방지원군 역할 / 손자 손홍렬씨 "혁명정신 유지·계승 더 중요"

▲ 정읍시 상평동에 위치한 손화중 장군 묘역에서 장군의 손자 손홍렬 씨가 비문을 가리키고 있다.

△지략과 포용력 갖춘 손화중

 

손화중 장군(1861~1895)은 정읍시 과교동에서 비교적 부유했던 토반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혁명에 투신하지 않았다면 한 세월 넉넉히 살았을 법하다.

 

그의 동학과의 인연은 지리산 청학동에서 시작됐다. 그는 1880년대 경치가 아름답다는‘조선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 처남 유용수와 함께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가 수도생활을 했다.

 

당시 영남지방에서는 동학이 한참 퍼지고 있었다. 동학사상에 심취한 그는 후천개벽의 동학 종교론에 깊은 감명을 받아 동학에 입교했다.

 

그는 ‘비폭력 무저항’이라는 교단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의 혁명론에 공감, 마침내 갑오년 3월 고창 무장에서 포고문을 공포하고 전국적인 동학혁명 대장정에 나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지략과 포용력을 갖춘 그는 동학군의 봉기를 막후에서 지휘하면서 동학군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그해 1월 고부봉기 때도 전봉준과 함께 앞으로의 투쟁 방법에 대해 상의하는 등 혁명의 처음부터 깊이 관여하면서 동학군의 진로를 결정했다.

 

손화중 장군 후손에 따르면 혁명 이전부터 전봉준은 손 장군을 스승처럼 대하며 혁명의 시기와 방법 등에 대해 논의했다.

 

무장기포 이후 그는 전봉준과 함께 농민군을 이끌고 전라도 일대를 석권했으며, 갑오년 3월 백산대회에서는 김개남과 함께 총관령으로 추대됐다.

 

그는 전주성 점령 후 2차 봉기 때 광주에서 기포, 북상하는 전봉준을 대신해 광주와 나주 등 후방을 지켰다.

 

일본군이 바다를 통해 전라도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것.

 

그는 이에 우선 관군을 진압할 필요를 느껴 1894년 10월, 11월 나주성의 수성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등 후방 작전을 주도했다.

 

하지만 끝내 관군의 반격을 견디지 못하고 광주로 후퇴했다.

 

이후 고창 질마재에서 체포된 후 일본군에 넘겨져 다음해인 1895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동학 대접주 손화중

▲ 손화중 장군

손화중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34세로 지도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교인 1만여명을 거느린 대접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고결한 인품과 학식 덕분이었다.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를 무장에서 시작한 것은 이곳을 근거로 하는 손화중의 강력한 동학조직이 있었서이다.

 

총 8000여명이 집결했다는 백산대회에 참여한 동학군 가운데 손화중이 이끈 농민군은 절반에 가까운 3500여명에 달했다.

 

또한 동학농민군의 최대승전으로 기록되고 있는 황토재싸움도 사실상 손화중의 조직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 거둔 승리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삼례 2차 봉기 이후 그는 북상에 참여하지 않고 나주 장성 지역에 머물면서 일본군의 후방교란에 대비했다. 이는 일본군이 나주 해안으로 상륙한다는 소문이 있었고 강력한 나주지역 반농민군세력의 준동을 막자는 의도에서 나온 결과였다. 또한 후방에서의 군량미 확보도 그의 책임이었다.

 

전쟁에 있어 든든한 후방지원군이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된다.

 

그만큼 그는 믿을 수 있는 동학 지도자였다.

 

하지만 공주 우금치 전투의 패배로 북상하던 동학군이 와해되면서 그의 목숨도 위험에 처하게 됐다.

 

끝내는 관군에 붙잡혀 사형 선고를 받게 되면서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섰던 그의 활약상도 역사 속으로 묻히게 됐다.

 

△“반목 보다 화합 통해 동학정신 계승해야”

▲ 손화중 장군의 손자 손홍렬 씨가 자신의 집에서 손 장군의 활약상을 다룬 관련 자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04년 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110년 만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정으로 동학농민혁명 후손들도 기를 펴고 살게 됐다.

 

이 때부터 국가기념일 제정을 위한 논의가 모아졌지만 각 지방자치단체간의 이견으로 기념일 제정은 난관에 부딪혔다.

 

이에 최근 동학혁명 유족회 측은 최근 특별법 공포일을 기념일로 지정해 줄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지역갈등 때문에 기념일을 정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지역성이 없는 날을 기념일로 하자는 의견이다.

 

이를 바라보는 동학 후손들의 마음은 쓸쓸하기 그지 없다.

 

손화중 장군의 손자 손홍렬씨는 “기념일이 뭐가 대수라고, 이렇게들 싸우는지 모르겠다”면서 “혁명의 정신을 유지, 계승하는 것이 현재로선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손씨는 이어 “동학이 ‘난’에서 ‘혁명’으로 인정 받은 지도 10년이 됐는데도 혁명정신보다 보여지는 기념일에만 집착하는 세태가 씁쓸하다”고 덧붙였다.

 

손씨는 “백성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애쓴 선조들의 얼과 기개를 본받아 대립 보다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