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 공통, 청춘 만세다

눈은 끝없이 내렸고 우리들의 목소리는 높아져만 갔다

▲ 이신혁 연세대 언론학부 1년
해가 떨어지자 공기가 더 추워졌다. 코쿠코엔(航空公園)역 근처의 마트에 들러 맥주 여섯 캔과 냉동 춘권을 사들고는 마을버스에 올라 조금 더 구석진 곳으로 들어갔다. 예고 없이 내린 두 번째 폭설 때문에 인적이 드문 곳은 이미 허벅지 높이만큼 눈이 쌓여 있었다.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정 찾아간 일본에서의 두 번째 날 밤이었다.

 

현지에서 예술을 공부하는 유학생 친구를 만나 10여 분을 눈밭에서 뒹굴다시피 하며 걸었을까, ‘짱구는 못말려’에서나 봤을 법한, 꽤나 깔끔하고 넓어보이는 집에 도착했다. 근방의 모든 친구들이 편하게 들락날락하는 ‘아지트’라고 했다.

 

그날도 정작 집주인은 영화촬영을 나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빈 술병이며 담배 꽁초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그 사이사이로 동년배로 보이는 몇 명이 앉아 있었다. 외관만 봐도 모두 하늘을 뚫을 듯한 개성을 자랑하던 그들에게 나를 한국의 영상학도 쯤으로 간단히 소개한 뒤 사온 맥주를 나눠 마시며 서로의 이야기를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콧수염을 적당히 기른 요시키는 가끔씩 질문에 답하는 때만 빼면 거의 말이 없었다.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고 했다. 덧붙여 그 무리 중에서 가장 주당이라, 일본주 한 병을 자기 몫으로 따로 가져와 혼자서 여유롭게 입에 털어넣고 있었다. 춤을 좋아해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가끔 혼자 몸을 흔들곤 했다.

 

훈이는 일본의 드라마에 빠져 대학까지 일본으로 진학해버린 별난 유학생이었다. 빨갛게 물들인 머리를 한쪽으로 넘긴 탓에 인상이 꽤 강렬했다. 사서 고생하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라 요즘은 현지에서 막노동부터 영화 엑스트라까지 다양한 경험을 쌓고 있다고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요리를 잘 하기로 정평이 나 있어서, 그날의 안주는 모두 그의 책임이었다.

 

아츠키는 어렸을 때부터 현장에서 활약했던 아역배우였다. 한국 영화에도 출연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경험에 비해 꽤나 겸손한 친구라 절대 먼저 자신의 자랑을 늘어놓는 일은 없었지만 새로운 화제거리가 나올 때마다 항상 그에 관한 방대한 지식을 쏟아내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기껏 일본까지 왔는데 이런 촌구석에서 시간을 보내도 되냐, 며 누군가 장난스레 물었다. 어차피 이러려고 왔다, 고 답했다. 일거리를 내팽개쳐두고 일본행 비행기에 오른 데에는 사실 ‘다른 나라의 청춘은 뭔가 다를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던 터라, 그 어떤 것보다 사람 만나는 자리가 고팠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기대감은 그날로 인해 보기 좋게 무너져 버렸다. 며칠 밤을 샌 촬영으로 고생했다던가, 이번 수업의 교수가 어떠했다던가 하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모두가 비슷한 불안감을 공유하고 있었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하나같이 눈을 반짝이며 열띤 토론을 펼쳤다. 서로의 시행착오를 나누는 낯익은 풍경, 어쩌면 국가를 막론하고 젊은 날은 그래서 더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상치 못했지만 그만큼 만족스러운 결론이었다.

 

그날 밤은 결국 이런저런 이야기에 모두 취기가 올라 꽤 시끌벅적한 자리가 되었다. 가끔씩 내가 공감할 수 없는 그들끼리의 이야기가 오고가는 와중에 요시키의 춤사위는 더 격해졌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아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눈은 끝없이 내렸고 우리들의 목소리는 높아져만 갔다. 만국 공통, 청춘 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