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삼 년 만의 소식치고 싱겁긴…서울에서 피아노 연주를 들으러 고창까지 내려가야 하나?’하면서도 아직 소녀감성을 잃지 않는 맑고 순수한 친구와 함께 멋진 새 봄을 맞고 싶은 생각과 함께 2년 전 폴리안스키 연주회에서 느꼈던 감동이 살아나 황급히 KTX에 올랐다.
고창 문화의 전당에 들어서는 순간 조금 전까지 걱정스러웠던 ‘중소도시에서 클래식 연주회에 얼마나 올까?’하는 의구심을 떨치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빈 좌석이 없음은 물론 뒤에 서있는 관객과 함께 더욱 놀라운 것은 제복을 입고 앉아 진지한 자세로 감상의 망중한에 빠진 30여명의 군인아저씨들이었다.
폴리안스키는 차이코프스키, 몬트리올, 동경국제콩쿨에서 입상한 우쿠라이나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서 유명 방송사와 음반 작업을 많이 하였으며 세계적인 실내악 연주가로 유명하다.
폴리안스키의 손에서 흐르는 베토벤 ‘소나타 23번 열정’은 베토벤이 음악적으로 성숙하고 한창 열정적으로 작곡할 때의 작품으로 프랑스의 대문호 로맹 롤랑은 이 곡을 ‘열정의 마음, 탄탄한 턱과 위쪽을 노려보는 날카로운 눈빛, 고뇌와 단련된 불굴의 기백이 그대로 다가오는 것처럼 여겨지는 작품’이라고 평한 것처럼 격렬한 고통과 애처로운 전율을 일으키는 1악장, 격정 뒤에 찾아오는 안식과 슬픔이 내면으로 잦아드는 2악장, 운명을 거부하는 듯한 힘찬 전주와 폭풍우를 불러일으키는 3악장으로 구성되어 그의 천재성과 창조성이 극명하게 나타난 곡이다.
폴리안스키의 연주를 들으면서 일생을 불꽃처럼 오로지 음악에 바친 베토벤의 인생과 이루지 못한 사랑을 함축한 듯한 감동이 몰려와 극도의 아름다움은 슬픔과 상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스트의 ‘돈주앙판타지’와 슈베르트의 즉흥곡 연주를 마치고 고창군민들의 기립박수 속에 3곡의 앵콜로 보답 했는데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로슈가 등 러시아 거장들의 곡을 연주했다.
특별출연한 예인음악예술전문대학 교장인 피아니스트 이봉기 씨가 피아노라는 악기로 사랑을 노래하는 시를 쓰듯 감미로우면서도 경쾌한 연주로 봄을 기다리는 고창군민들의 마음을 아름답고 여유롭게 어루만져 주었다.
옆에 앉은 젊은 한 쌍이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음악이 이렇게 인간의 영혼에 감동을 주는지 몰랐어요. 오늘밤을 선물해 준 당신께 감사하고 행복해요….’
연주회를 마치고 나서니 훈훈한 남풍에 매화향이 불어오는 듯한 아름다운 밤에 마음이 넉넉한 아름다운 친구를 남겨두고 다시 서울행 KTX에 올랐다. 까만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가슴 한가득 안고….